詩와 글과 사랑

우산 / 박연준

maverick8000 2023. 7. 17. 14:00

 

 

우산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박연준(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