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제사의 정석

maverick8000 2023. 10. 10. 08:10
제사의 정석

 

 

유교의 본산인 성균관은 필자와 인연이 많다. 성균관 유생으로 입학해 박사를 졸업했고,

성균관 청소년국장, 교육원장을 역임하며 각종 전통 의례나 제사와 관련된 행사를 주관했으니

많은 사람이 필자에게 한국의 의례에 관해 묻는 일이 많다.

 

특히 추석이나 명절 전후에는 제사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한다.

“부모님이 요양원에 계신데 제사를 꼭 지내야 하나요? 제사 대신 산소에 가서 조상에게 예를 표하면

안되나요? 부모님 기제사를 같은 날로 정해 합사(合祀)해 지내면 안될까요?”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서

제사의 절차, 음식, 제사를 모시는 조상의 범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 등 다양한 질문을 한다.

 

그럴 때마다 하는 대답은 하나다. “지금 처한 형편대로 하세요”다.

 

결국 제사에는 정석이 없다.

율곡 선생은 장손이 혼자 제사를 지내면 부담이 되니 자손들이 돌아가며 지내라고 권유했고,

가난하면 가산(家産)에 맞춰 지내고, 병이 있으면 있는 힘만큼 제사를 지내면 충분하다고 했다.

제사는 정석이 없고 후손의 공경과 정성이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재(齋)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으니, 현대에 와서

교회나 성당을 찾아 추모하는 것도 무방하다.

 

제사(祭)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축제(祝祭)다.

조선의 국가 의례서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제사는 길례(吉禮)로 규정하며 행복한(吉) 의례임을

분명히 했다. 조상을 매개로 흩어졌던 자손이 모여 평소에 풍족하게 못 먹던 음식과 술을 준비해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축제는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남자만 행복하고 여자들은 불행한 제사와 명절은 조상님도 원치 않는 바다.

제사는 부모님까지만 지내도 충분하다. 여유가 있어 일년에 몇번씩 제사를 지내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어느 한날 정해 제사를 지내는 것도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도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낼 것을 권고한다.

제사 지내는 사람도 반드시 장손일 필요는 없다. 아들딸 친손외손 구별 없이 자손들이 형편에 맞춰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도 조선시대에 흔했다. 딸이 시집가서 부모 제사를 모시는 것도 좋다.

어려서 외할머니 손에 키워진 손자가 외할머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제사 음식은 특별한 규정 없이 집마다 각자 형편에 따라 지내야 하니 가가례(家家禮)이다.

‘남의 집 제사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말라’는 옛말은 자기 집에서 지내는 음식 차림을 기준으로

다른 집 제사에 함부로 간여하지 말라는 뜻이다. 산골에서는 산나물로 정성스럽게 제수를 차리고,

바닷가에서는 해물로 제수를 차리면 된다.

제수의 규모나 종류에는 정해진 바가 없으니 오로지 정성으로 차린 간소한 음식이 더욱 효성이

배어 있는 상차림이다.

 

어느 집안에서는 갈치니 꽁치니 ‘치’자 들어가는 음식을 제사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으나 이것 또한

그 집안의 관습일 뿐이다. ‘치’자가 ‘어리다(稚)’ ‘부끄럽다(恥)’는 뜻을 가진 한자와 발음이 같아서 생긴 일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며 명절을 지내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일찌감치 산소에 가서 조상을 만나고 추석 연휴에는

각자 자기 방식대로 보내기도 하고, 추석날 모여 간단히 제사를 지내고 헤어지기도 한다.

집안 상황에 따라 형편에 맞게 추석을 맞이하는 가족도 많다.

긴 연휴가 끝났다. 모두 다툼 없이 가족의 화합을 다진 시간을 보냈는지 사뭇 궁금하다.

 

 

출처 : 농민신문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