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해도 괜찮아
‘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무인 카페를 처음 와서 모르고 얼음을 쏟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고
치우겠습니다. 작은 돈이지만 도움 되길 바랍니다. 장사 오래오래 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얼마 전 자영업자 커뮤니티에 한 초등학생이 무인 카페에서 놀다가 제빙기에 컵을 놓지 않고
레버를 눌러 얼음을 쏟았다며 손글씨로 쓴 사과 편지와 1000원짜리 지폐 하나를 남기고 갔다는
사연이 올라왔다. ‘실수를 인정하다니, 크게 될 아이다’ ‘부모님이 잘 키웠다’ 같은 댓글이
수십 꼭지 달렸다.
편지를 읽으며 나 역시 감탄했다. 이 초등학생이 쓴 사과문엔 놀랍게도 외국의 유명 석학이나
위기관리 전문가들이 누누이 강조하는 ‘사과(謝過)의 4원칙’이 완벽하게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①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끗하고 빠르게 인정할 것
②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표현할 것
③'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나지 않지만’ ‘일부러 하진 않았지만’ ‘그러나’ 같은 말을 붙이는
조건부 사과를 하지 말 것
④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국내외 저명한 학자들은 흔히들 사과할 땐 이 4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키라고 조언한다.
그래야만 상대방이 제대로 된 사과라고 느끼고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야당의 한 인사가 쓴 글이 생각난다. 그는 자신의 성추행 발언을 해명하면서 ‘피해자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사과하겠다’고 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당시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말은 못
들었다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과인지 변명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일단 미안하다’는 식의 전형적 조건부 사과다.
초등학생 아이도 본능적으로 지키는 사과의 기본 원칙을 일부 공직자, 연예인, 정치인은 이렇게
종종 어기거나 잊거나 외면한다.
그들뿐이랴. 우리 중 상당수가 아직도 사과에 서툴다. 사과하면 진다고, 패자(loser)가 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국의 전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도 “사과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디즈레일리는 그러나 1800년대 사람이다.
시대는 변했고, 이젠 사과를 잘해야 승자(winner), 리더(leader)가 될 수 있다.
글로벌 제약 회사 존슨앤드존슨의 리콜 사태는 사과로 위기를 돌파한 모범 사례다.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 타이레놀을 복용한 환자가 숨지자, 당시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시카고
지역 제품을 회수하라고 권고했지만 존슨앤드존슨은 미국 전 지역의 타이레놀 3100만캡슐을
바로 회수했다. 소비자에게 TV 광고로 그 사실을 적극 알려 사과했고, 독극물이 유입될 수 없도록
캡슐 약을 태블릿 형태로 바꿨다. 바닥을 쳤던 타이레놀의 시장점유율은 1년이 걸리지 않아
예년 수준을 회복했다.
국내 한 백화점 그룹 사례도 있다. 이 회사 대전점 아웃렛에 불이 난 것은 재작년 9월 22일
오전 7시 40분쯤. 이 회사 회장은 보고를 받자마자 현장에 내려가 오후 4시쯤 “어떠한 책임도
회피하지 않겠다. 피해를 보신 모든 분과 지역 주민 여러분께 거듭 사과한다”면서 허리를 숙였고,
화가 더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사과에 대하여’란 책을 쓴 사회심리학자 아론 라자르는 이렇게 우리를 격려한다.
“사과하고 난 뒤의 상황이 두렵겠지만, 그 공포는 과장된 경우가 훨씬 많다. 바뀌는 건 생각보다
별로 없다. 수치심은 도덕적 실패가 아닌 고결함의 증거가 된다.
사과는 상처를 치유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임을 기억하자.”
성숙한 사과는 그렇게 우리를 결국 승자로 만들 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