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도 영 못하는 게 있다

골든 라즈베리라는 시상식이 있다. 최악의 영화에 상을 주는 행사다.
1981년 시작됐으니 제법 역사도 있다. 워낙 유명해진 덕에 후보에 오른 영화인이 실제로 참석하는
일도 몇 번 있었다. 유명한 건 2005년 ‘캣우먼’으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받은 할리 베리다.
“훌륭한 패자가 될 수 없다면 훌륭한 승자도 될 수 없다”는 멋진 소감을 남겼다. 역시 대장부다.
한국에서 골든 라즈베리 같은 시상식이 열릴 리 만무하다.
‘스타상’ 같은 이상한 부문까지 만들어 잘했든 못했든 모두에게 골고루 상을 나눠주는 게
미덕인 나라다. 후보를 발표하는 순간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다.
연기를 정말 못했잖냐 항변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이 있는 나라라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최고 배우도 골든 라즈베리를 받는다.
2023년 최악의 남우 조연상 수상자는 ‘엘비스’의 톰 행크스였다. 나는 톰 행크스의 오랜 팬이다.
수상 결과에는 이의 없다. 톰 행크스는 엘비스 프레슬리 골수를 빼 먹은 매니저를 연기했다.
특수 분장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기까지 한 열연이었다. 열연이 다 명연은 아니다.
상은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라 잘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썩 잘하는 게 없었던 우리 대부분은 학창 시절 그 나름의 열연을 펼친 뒤 ‘노력상’이라는
별 의미 없는 상장을 손에 들고 기뻐했던 것이다.
‘엘비스’는 톰 행크스의 첫 악역이었다. 영웅만 연기한 노배우의 늦은 도전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며 한탄했다. 톰 행크스는 악역을 못했다. 놀랄 정도로 못했다.
톰 행크스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꽤 위안이 되는 이야기다.
40년 경력 대가도 영 못하는 게 있다는 위안 말이다.
그러니 설에 고향으로 향하는 당신도 못하는 전 부치기에 굳이 도전할 필요는 없다.
전은 동네 시장 숙련된 전 집 주인들이 제일 잘 부친다.
출처 : 조선일보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