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아주 사소한 것들

maverick8000 2025. 2. 7. 14:08

 

 

그것을 발견한 건 새해 첫날이었다. 쾌활한 느낌보다 어수선하고 묵직한 기운이 강한 새해였다.

나는 최소한의 사람들과만 신년 인사를 나누었다. 탁상 달력을 새것으로 바꾸고 사골국에

떡과 파를 잔뜩 넣어 끓여 먹었다.

올해의 운세는 보지 않았고 작성하고 있던 문서의 연도를 2025년으로 바꾸었다.



그 정도의 번거로움이 더해졌을 뿐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오후였다.

나는 느릿느릿 산책에 나섰다. 비와 눈 소식이 잦은 탓에 하늘이 희부윰했다.

아파트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을 지나려는데 그것이 눈에 띄었다. 보행자 통로 쪽으로 슬그머니

밀려 나와 있는 마호가니 콘솔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것은 꽤 고급스러웠다. 굽이치는 물결 모양 상판과 그에 맞춤하게 깎은 유리판,

조금의 뒤틀림도 없는 서랍 세 개와 곳곳의 주물 장식을 나는 찬찬히 살폈다.

부드럽게 부푼 곡선 다리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가늘고 단단해지는 것이 특히 예뻤다.

버린 물건 맞나? 나는 주위를 둘렀다. 이사하다 잠깐 내려놓았거나 배송 중인 상품이라 해도 좋을

만큼 콘솔은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나처럼 고개를 갸웃대며 콘솔 주위를 맴도는 사람이 두어 명 더 있었다.

수거장에 놓인 물품들에 마땅히 붙어 있을 폐기물 스티커가 없는 탓에 더욱 헷갈렸다.



누구라도 가져가겠지.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콘솔을 생각했다.

주인이 찾아가든 다른 사람이 가져가든 콘솔은 금세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것 같았다.

그게 나였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에서 물건을 주워본 적도, 콘솔이 필요했던 적도

없으면서 괜히 욕심을 낼 정도로 콘솔은 예뻤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콘솔은 그 자리에 있었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렸고 잠깐 해가 났다가 연이어 눈과 비가 쏟아졌다.

 

나는 내내 집에 머물다 거리에 눈이 모두 녹은 뒤에야 산책을 나섰다.

콘솔은 상판 모서리가 깨지고 물 얼룩이 지저분하게 남아 이제 누가 봐도 '버린 물건'으로 보였다.

유리 중앙에 흰색 보드마커로 글자가 쓰여 있었다.

'스티커 붙여서 버리세요.' 1월 중순쯤 되니 흰색 글자들이 훌쩍 늘었다.

'CCTV 확인 중, 확인 완료. 108동 21층 1월 1일 오전 10시 30분께 배출.'



원목 특유의 그윽한 빛도 매끄러움도 더는 콘솔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서랍 하나가 어딘가로 사라졌고 왼쪽 다리에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옆에 놓인 철제 선반 때문이었다. 어느 틈엔지 선반과 어린이용 책장, 여행용 가방과 스툴 등등이

콘솔 주변에 얼기설기 쌓여 있었다.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물품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엉망이 된 분리수거장을 바라보았다. 스티커를 살 수 있는 상점은 주변에만 다섯 곳이 넘었다.

간혹 그냥 내놓은 물건에 경비아저씨가 경고 문구를 쓰면 곧바로 폐기물 스티커나 온라인 접수

번호가 쓰인 종이가 붙곤 했다. 물건을 버릴 때 그에 맞는 값을 치르는 건 몹시 단순한 규칙이었다.

모두가 당연히, 그것을 지켜왔다.



경비아저씨는 이제 21층에 올라가 세 개의 현관문을 모두 두드려야 할 것이었다.

콘솔뿐 아니라 선반의, 책장의 주인을 찾기 위해 쉴 틈 없이 CCTV를 돌리고 경고 문구를 쓰고

여러 층을 오르락내리락할 터였다.

콘솔 주인이 처음 그것을 내놓을 때 5000원짜리 스티커 한 장만 붙였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랬다면 작은 물웅덩이 위에 물건들의 무덤이 만들어질 일도, 부서진 물건들이 보행자 통로를

침범할 일도, 험한 광경에 눈살 찌푸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상의 무너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온다.

그것을 어떻게 원래의 쾌적함으로 되돌릴지에 대한 답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안보윤 소설가

 

출처 : 매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