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
어수선한 연초가 지나고, 설 명절까지 보내고 나니 비로소 새해가 온 듯한 기분이다.
정신없이 흘러간 연말과 연초 탓에 지난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진득이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년은 나에게 어떤 한 해였나. 벌써 까마득하다.
정체 없이 부유하는 기억들이 작년의 일인지, 그것보다 더 이전의 일인지 구분 없이 머릿속에서 표류한다.
지금이야말로 차근차근 되짚어봐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작년 한 해 내가 새롭게 시작한 일이 있었나?
연초에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라는 책을 읽고, 어떤 방식으로든 하루를 기억하고자 마음먹었던 일도
결국 계획만 남은 채 사라졌다. 덕분에 쓰지 않은 일기장이 하나 더 생겼고, 그 일기장은 첫 장이 북북
찢어져 낙서장이 될 운명이었다. 매년 마음먹는 영어 공부도 하루 만에 끝이 났다.
영단어라도 외워보겠다며 야심 차게 구입한 단어장은 하루 만에 침대 옆 책꽂이에 자리 잡았고,
다음 날 보려고 책 사이에 끼워둔 연필도 얼마 전 치워버렸다. 그냥 영어 공부 책만 하나 더 가진 사람이 되었다.
고치기로 마음먹은 습관 중 개선한 것이 있었나? 마른빨래를 개지 않고 소파에 던져두는 버릇이 있다.
심할 때는 쌓인 빨래가 내 허리 높이까지 오른다. 1년에 소파를 사용할 수 있는 날보다 그러지 못하는 날이
훨씬 더 많아지다 보니, 이 고약한 버릇을 고치고자 했지만 결국 피곤한 나에게 매일 밤 져버렸다.
소파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산다. 습관처럼 먹던 야식을 줄이지도 못했다.
일상에 변화를 준 일이 있었을까? 금요일 밤마다 근사한 주말을 상상한다.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가거나,
근사한 북 카페에서 온종일 책을 읽거나, 낯선 동네를 산책하며 카페 투어를 즐기는 모습을.
하지만 대부분 실현되지 못하고, 주말도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간다.
집에 틀어박혀 이미 본 드라마를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식물에게 물이나 주고, 익숙한 얼굴들과 운동하고
익숙한 식당에 매번 들러 밥을 먹는 게 내 주말의 전부다.
그럼 내가 작년을 ‘잘못’ 살았던 걸까?
문득 거실을 가득 메운 건강한 식물들을 바라보다, 작년 이맘때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올해 건강한 당근과 온전한 모양의 토마토와 아름다운 장미를 기르는 데 실패했다고 해서 내년에도
실패하리라는 법은 없다. 한 번 더 해보자. 올해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서 내년에는 좀 더 잘해보자.
왜냐하면 사계절은 이 인생에서 딱 한 번뿐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는 또 다른 사계절이
패자부활전처럼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한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매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또 습관처럼 나 자신에게 박하게 굴고 있었다.
실패에만 집중하다 보니, 매일 해오던 일들을 매일같이 해낸 것에 대한 칭찬을 또 빠트렸다.
올해는 자잘한 실패에 시선을 두지 않고 느긋하게 화분을 키우듯 나를 돌봐야겠다.
뿌리가 자라면 화분을 옮겨주고, 적응하지 못하면 다시 두 번, 세 번 옮기고, 잎이 마르면 물을 주고,
기어코 새 잎을 내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계속해서 기회를 줘야겠다.
채근하지 않고, 뿌리가 내릴 때까지 다정하게 나를 지켜봐야겠다.
늘 한 해가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매년 내게 기회를 주며 돌아오고 있었다.
한 번에 성공하는 일도, 실패하는 일도 없다. 작년이 아니었다면 올해, 또 내년이 되면 생각했던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변화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오기도 하니까.
올해만큼은 나에게 조금만 더 다정하길 바라본다. 새롭진 않아도 충만한 삶이 되길 바라며.
강민지 / '따님이 기가세요' 저자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