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세월의 물결이 어여쁘구나

maverick8000 2025. 2. 13. 10:04

 

어느덧 새봄

달밤은 깊어가네

얼굴의 주름

はる つきよ かお しわ

はつ春も月夜となるや顔の皺

 

‘사람 얼굴은 어딘가 예쁜 구석이 하나라도 있으면 아무리 봐도 싫증이 안 나는 법이다.

그림 같은 것은 몇 번 보면 금방 질려 버린다. 옆에 세워 둔 병풍의 그림 속 인물도 예쁘기는 한데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은 안 든다. 그러고 보면 사람 얼굴은 참 오묘하다.

받침대 같이 하찮은 것도 어디 한 군데 좋은 점이 있으면 자꾸 보게 되는데 하물며 사람 얼굴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보기 싫은 곳도 그와 마찬가지로 금방 눈에 띈다고 생각하면 기운 빠진다.’

 

 

얼굴 하면 떠오르는 산문.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헤이안 시대 교토의 궁궐에서 중궁을 보필하는 일을 하던 여성

세이쇼나곤이 썼다. 머리맡에 붓과 종이를 두고 그날그날 자기 눈에 비친 모습과 떠오른 생각을

적었다 하여 ‘베갯머리 서책’이라 이름 지은 책이다. 일본 수필 문학의 효시라 한다.

 

이런 글을 읽으면 1000년 전의 사람 얼굴을 상상해 보게 된다. 몸에 두른 옷은 다르겠지만,

얼굴에 담긴 표정이나 온화한 주름 같은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어딘가 예쁜 구석이 하나라도 있으면’ 같은 말도 크게 와닿는다.

오랜 세월 햇살과 바람으로 빛이 바래더라도, 그 사람만의 개성이 정감 가고 마음에 들면 자꾸

보고 싶어지는 법이다. 참 오묘한 얼굴이다.

 

잇사(一茶·1763~1828)도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새해 새날이 밝는가 싶더니 어느덧 새봄의 문턱. 또 한 살 나이를 먹네. 그러나저러나 달밤에도

가릴 수 없는 건 얼굴의 주름이다. 가만히 한 줄 두 줄 어루만져 보는 인간의 나이테.

볼에도 있고, 이마에도 있고, 목에도 있다. 세월의 물결이다.

달빛이 찰랑찰랑 그 물결에 드리운다. 지난봄에는 못 보던 녀석인데 그새 식구가 늘었네.

슬며시 미소 지으면 더 깊어지는 주름의 골이다.

 

그래도 예쁘다, 예쁘다, 어여쁘구나. 그렇게 말을 걸며 정을 주니 또 예뻐 보인다.

그림 같은 것은 가질 수 없는 인간의 참맛이 여기서 나온다.

내 주름이고 네 주름이고 예쁘다, 예쁘다, 하며 어루만져 주고 싶다.

새봄의 달빛 받아 은빛 물결처럼 더 반짝이네. 참말로, 참말로, 어여쁘구나.

 

 

정수윤 작가/번역가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