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의 푯말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하다 창고에 있던 상자를 꺼냈다.
잡동사니를 담아둔 상자에는 다이어리도 있었는데 가죽 표지에 음각으로 2009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믿음이 시든 자리에 불안과 의심이 싹트던 시절, 나는 다이어리에 여러 잠언을 적고 혼잣말처럼
곱씹는 습관이 있었다. 나약한 의지가 게으름에 속수무책 당할 때, 긴장과 중압감에 짓눌려
도망치고 싶을 때, 고뇌와 상념의 틈에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을 때도 기도문처럼 되뇌었다.
그렇게 종이에 쓰고 마음에 새겨넣은 문장들에 꽤 오랜 날을 의지했는데, 누군가의 슬기였고
누군가의 깨달음이었던 말들이 어느 순간 정신 깊이 박여 삶의 태도가 돼 있었다.
잠언은 넘어진 나를 달래 일으켜 세우고, 잘못에는 훈계를 서슴지 않으며 매 순간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했다.
일례로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핑계가 보인다’는 문장은
작업자로서의 깊은 고민에 답을 알려주고, 내면의 갈등 속에서 저울질할 때면 양심과 진정성에
무게를 실어주고, 살고 싶은 삶을 향해 가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당차지는 못했어도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디뎌 인생이라는 삶의 능선을 만들어왔음을 낡은 다이어리를
보며 생각했다. 제아무리 좋은 글귀여도 몸소 경험하며 깨우쳐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되는 것이리.
흰색 속지가 누렇게 색이 바랠 만큼의 시간을 거쳐.
삶의 능선은 희비와 고락을 갈마들며 이어지고 ‘나’라는 유일무이한 이야기를 만든다.
그 길에는 숨을 고르고 자신을 돌봐야 하는 구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 난제를 풀어낼 실마리처럼,
현자의 가르침처럼 믿고 따를 글귀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마음에 새긴 푯말들이 가야 할 방향을 인도해 주리라 믿는다.
나에게는 걸어온 만큼의 길이 아직 남아 있기에 잠언의 지혜로운 힘을 빌려 꿋꿋하게
삶의 능선을 이어가려 한다.
그대가 숨 고르는 그곳 푯말에는 어떤 문장이 쓰여 있나.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