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는 아플수록 복기한다
영화 '승부'를 보기 전에는 이창호 9단의 성장 드라마인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조훈현 9단의 재기 드라마였다. 알다시피 조훈현과 이창호는 사제지간이다.
이창호는 스승을 넘어서며 청출어람의 본보기를 보여주지만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창호에게 모든 타이틀을 빼앗기고 바닥으로 떨어진 조훈현이 제자에게 다시 도전하는 게
서사의 중심이다.
바둑을 소비한 영화는 더러 있었지만 바둑 인생을 진지하고 깊게 들여다본 영화는
‘승부’가 처음이다. 1989년 제1회 잉씨배에서 세계를 제패한 조훈현은 김포공항에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집에 돌아오니 열네 살 여드름투성이 이창호(당시 4단)가 기다리고 있었다.
1984년부터 한집에서 먹고 자며 가르친 제자. 그런데 바둑 스타일은 서로 정반대였다.
‘승부’는 대국이 아니라 복기 장면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복기란 이미 둔 바둑을 처음부터 다시 짚는 일이다. 어떤 수에서 승패가 갈렸는지, 승자는 무엇을
보고 패자는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흑돌과 백돌로 ‘가지 않은 길’을 놓아보는 것이다.
물어뜯고 덤빌 대목에서 왜 물러났냐고 조훈현이 꾸짖자 이창호가 떠듬떠듬 대꾸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자칫하면 역전당할 수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적어도 반집은 이긴다고.
제자는 스승을 이기기 위해 스승의 기보를 복기한다. 조훈현의 바둑은 빠르고 날렵하며 공격적이다.
이창호는 느리지만 두텁고 묵직하다. 조훈현이 강수를 두고 기세를 올릴 때 이창호는 싸움을 피하며
안전한 길로 간다. 시끄럽게 하지 않고 조용히 반집만 이기는 계산 바둑이었다.
이창호는 1990년부터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둘 빼앗기 시작했다.
1995년 조훈현은 다 털리고 무관(無冠)으로 전락한다. 수없이 죽는 경험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훈현은 패배에 익숙해지거나 좌절하며 몰락하지는 않았다.
이 승부사가 바닥을 치고 올라가 다시 정상에 서는 과정이 ‘승부’의 하이라이트다.
영화에서 조훈현은 말한다. “창호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내가 언제든 질 수 있다는 걸.
창호가 그랬듯이 이제 제가 창호에게 도전해야죠.”
승부의 세계에서 복기는 기본이다.
복기를 해야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국회에서 조훈현을 만났다. 비례대표로 금배지를 달았지만 정치판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불출마를 선언한 때였다.
“바둑은 실수가 적은 쪽이 승리하는데 정치도 마찬가지더군요. 여당이나 야당이나
‘누가 더 못하나 경쟁’을 하고 있어요. 정치인들이 복기하고 반성하면서 민심을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바둑판만 끌어안고 고요하게 산 줄 알았는데 머릿속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요동치는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조훈현은 젊은 나이에 전관왕과 세계 일인자에 올랐다가 제자에게 다 빼앗긴 과거를
‘쓰라리면서도 행복한 경험’으로 회고했다.
당장은 괴로웠지만 더 잃을 게 없는 바닥이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 생각하니 홀가분해졌다고.
담배를 끊고 기풍을 바꿨다. 1998년 국수전 결승에서 이창호를 꺾으며 그는 부활했다.
조훈현의 가장 큰 적은 과거의 영광과 익숙한 기풍에 갇힌 자신이었다.
통산 1966승 9무 846패. 여전히 현역인 그는 최선을 다해 바둑을 두고 복기한다.
포석, 행마, 대세점, 형세판단, 사석작전, 타개…. 적을 적으로만 본다면 결코 배울 수 없다.
마음을 고쳐먹으면 행동이 바뀌고 결과도 달라진다.
바둑판에서 얻은 깨달음이지만 어느 인생이나 근본은 같다.
왜 실패했는지 정확히 진단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고수는 아플수록 복기한다.
출처 : 조선일보 태평로 [박돈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