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법정에 선 건 아들인데 대답한 건 어머니

maverick8000 2025. 5. 2. 10:22

 

 

 

“피고인 이름이 김민수 맞습니까?”

“네, 맞아요.”

피고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판사의 질문에 대답한 건, 서른 살 김민수씨 본인이 아니었다.

피고인석 근처 방청석에 바짝 붙어 앉은 머리 희끗한 아주머니였다.

 

“피고인, 직접 대답하세요.”

“아유, 우리 애가 영 숫기가 없어서. 이런 데 처음 나와보는데 얼마나 무섭겠어요.”

“피고인 어머니십니까?”

“판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얘가 세상 착한 앤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과장 하나 없는, 실제 내가 목격한 일이다.

아주머니는 경위에게 붙잡혀 끌려나가듯 퇴정하면서도 아들을 위해 필사적 변론(?)을 계속했고,

피고인은 고개를 떨군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친의 행동이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정말로

숫기가 없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유행한 ‘캥거루족’이라는 용어는, 성인이 되었는데도 부모 집에서 함께 살거나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자녀를 일컫는다. 부모와 함께 살더라도 월세나 가사를 합리적으로 분담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심리적 정서적으로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는 경우가 심각하다.

대학생 자녀가 중간고사 때 지각했는데 봐주면 안 되겠냐는 학부모의 전화에 난감했다는 교수,

애가 전화를 안 받는데 직접 연결 좀 해 주면 안 되겠냐는 사원 부모의 전화를 받고 황당했다는

대기업 관리자 등의 사연이 도시 괴담처럼 떠돈다.

 

법조계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검사 시절, 자식과 함께 조사받으러 오겠다는 부모들의 억지에

여러 번 애를 먹은 기억이 생생하다. 실제로 수사기관에서는, 범죄 피의자나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원활하게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우려될 경우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게

보장해 주는 ‘신뢰 관계인 동석’ 제도를 두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아무나 데려올 수 있는 건 아니고, 미성년자, 장애인, 외국인, 성범죄 피해자인 여성 등에

한하여 직계가족, 형제자매, 배우자, 동거인, 교육 시설 보호자 등을 데려올 수 있다.

 

그러나 ‘헬리콥터 부모’의 프로펠러는 그런 걸 개의치 않고 쌩쌩 돌아간다.

서른 살, 마흔 살 먹은 자녀가 선임한 변호사가 미덥지 않다고, 걔가 뭘 알겠냐며, 당장 대법관

검사장 출신으로 바꾸라고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와 소리 지르기도 한다.

자식이 수사를 받든, 재판을 받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끼어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마는 부모가

오늘도 법조 타운에 넘쳐난다.

 

혹자는 MZ세대를 탓한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해 부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고.

정말 그럴까? 사람은 누울 자리가 없으면 구태여 발을 뻗지 않는다.

자녀와 자신의 인생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녀의 성과와 성공에 끝없이 집착하고 간섭하는 부모에게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들은 애정과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에 대한 불신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식이 스스로 문제 상황을 직면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가 신이 아닌 이상, 자식에게 일어나는 모든 돌발 상황을 막아줄 수는 없다.

부모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질병, 사고, 해고, 파산 같은 무서운 일은 결국 찾아오고야 만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상황에서 의연히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음주 운전한 아들 대신 내가 운전했다고 나서는 건 진실한 모성이 아니다.

처벌을 면한 사람은 다시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고, 그러다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을 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에 나와 있는 수많은 ‘아기’를 바라보며, 진짜 부모의 역할이 뭔지 생각해 보는 하루다.

 

서아람 변호사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