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심야 아르바이트, 엄마의 누드 김밥

maverick8000 2025. 5. 8. 16:57

 

 

최근 2년간 엄마의 일상은 몸이 편치 않은 아버지를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고향의 일은 엄마에게 모두 미뤄놓고 나는 여느 자식들처럼 어느 정도 모르는 척,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와중에 올해 초, 엄마가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도전해 보겠다며 전했다.

들어보니, 교육만 하루 9시간씩 두 달을 듣고, 실습 한 달, 그 후엔 시험을 통과해야 자격증을 딸 수 있단다.

엄마는 어차피 하는 병간호라면 자격을 갖추고, 가족 요양으로 월급이라도 조금이나마

벌 수 있다면 좋겠다며 도전 의지를 굳혔다.

 

나는 말로는 응원을 뱉었지만 머리로는 물음표를 띄웠다. 엄마가 그 긴 교육 시간을 어떻게 견딜까,

시험은 또 어떻게 할까. 평생 장사에 매달려온 엄마가 책상에 앉아 책을 펴고 공부하는 모습은

상상으로도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들은 아무 의미 없었다.

엄마는 교육이 시작하자마자 친구들을 만들어 함께 도시락 나눠 먹으며 여고 시절 학교 다니듯

교육을 마쳤고, 시험조차 단번에 합격해 버렸다. 역시 우리 엄마다웠다.

 

엄마 소식에 불현듯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네 식구가 식당 안쪽 단칸방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시절 우리 집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잘 모르지만, 언젠가 집 안 가전과 가구에 빨간 딱지가 붙어 있던 장면은 또렷하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기에 마치 드라마 속 장면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무렵, 나는 엄마와 함께 자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밤 11시가 훌쩍 넘어 장사를 마치고서도 엄마는 곧장 동네 김밥천국으로 야간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어느 날은 엄마가 오빠와 나를 앞에 앉히더니 신나서 누드김밥을 연신 만들어줬다.

그날은 소풍날도 아니고, 누구 생일도 아니었는데 누드김밥을 완벽하게 만들게 된 일을 축하하며

김밥 파티를 열었다. 그날은 신난 엄마의 모습에 덩달아 우리도 신나서 배 터지게 김밥을 먹었다.

 

이상하게도 그날 일이 가끔 떠오른다. 김밥을 먹을 때, 퇴근할 때, 별 이유 없이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엄마는 아마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 하실 테지만, 내게는 오래도록 선명한 장면이다.

단순히 엄마의 강한 생활력 때문이 아니다. 집안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식구들은 줄줄이

모두 자신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고, 밤낮없이 일터를 오가는 상황에서, 지친 모습보다는

웃는 얼굴을 보여주려 노력했던 젊은 엄마의 얼굴 때문이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나 하나 먹여 살리기도 지쳐 엄마 얼굴만 보면 짜증을 내는데,

엄마는 피곤 속에서도 웃고, 삶 속에서 재미를 찾아냈다.

살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칠 때, 나는 늘 엄마의 누드김밥을 떠올린다.

 

엄마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 놀랍다.

엄마는 그저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엄마처럼 사는 건 누구라도 쉽지 않다.

틈만 나면 내게 주문하는 ‘찡그려 붙이지 말고, 뭐가 됐든 재밌게 살라‘는 말은 엄마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었다.

큰일도 작은 일처럼 여기려 노력하고, 힘겨운 상황에 자신이 매몰되게 방치하지 않는다.

엄마의 그런 모습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다.

엄마는 어디서나 본인의 할 일을 찾아내고, 순간의 즐거움을 찾아내고, 결국 내 삶에 귀감이 된다.

 

 

부끄러워 엄마에게는 이야기해 본 적 없지만, 누군가 내게 롤 모델을 물으면 단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엄마’라고 답해왔다.

되고 싶은 누구도, 닮고 싶은 어떤 이도 딱히 없지만, 그냥 엄마처럼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힘이 난다.

내가 엄마에게 매일 짜증만 낸다고 해서 자식 농사를 다 그르쳤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엄마 앞에 서면 인내심 같은 건 바닥난 사람처럼 굴지만, 진심은 바뀌어본 적이 없다.

난 언제나 엄마같이 살고 싶다. 5월 둘째 주 일요일 어머니의 날을 기념하며 엄마에게 내 진심을 바친다.

 

 

강민지 : '따님이 기가세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