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아렌트의 길, 바우만의 길

maverick8000 2025. 5. 30. 11:22

 

 

 

일할 때 음악을 듣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유튜브를 통해서다. 놀라운 것은 유튜브가 기억하는 나의 취향이다.

그룹 퀸의 노래를 듣고 나면 너바나와 콜드 플레이 등의 노래들이 이어진다. 알고리즘이 편하고 또 기특하다.

동시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때때로 당혹스럽다.

 

음악뿐만이 아니다. '빠니보틀'과 '곽튜브' 등은 이따금 방문하는 여행 채널들이다.

가고 싶은 여행지들에 관한 사전 정보도 얻고, 엄두가 나지 않는 나라들 여행에 대한 대리 만족도 느낀다.

여행 유튜버들은 내 상상의 여행 지도를 인도 또는 중앙아시아까지 넓혀 놓았다.

이러다가 언젠가 인도 갠지스강을 보러 갈지도 모르겠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 대해 나는 '얼리 어댑터'라기보다 '슬로 어댑터'에 가깝다.

주위의 권유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지만 '눈팅'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자기 표현과 자기 노출이

함께하는 페이스북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기를 '극단적 I'에 가까운 나의 MBTI가 아직은

허락하지 않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힘은 소통을 통한 인정 욕망에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살고 움직이며 행위를 하는 복수의 인간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남긴 말이다.

소통이 존재의 조건이라는 아렌트의 통찰은 소셜미디어 시대가 열린 이유를 일러준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든, 유튜브 '라방'에서 소통을 나누든 소셜미디어는 '내가 여기에 살아 있음'을 증거한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남긴 말이다.

외로워서 접속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상실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시간이

박탈당하는 것을 바우만은 우려한다. 넘치는 가상의 관계와 빈곤한 현실의 관계가 혼돈스럽게 공존하는 게

우리 시대의 또 하나의 자화상일 것이다.

 

페이스북이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04년이고, 유튜브의 경우는 2005년이다.

어느새 20년이 흘러 소셜미디어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됐다. 막바지에 도달한 이번 대선에서도

소셜미디어의 힘을 실감하고 있다. 페이스북에는 열광과 적대의 글들이 넘쳐나며, 유튜브에는 재치 있고

자극적인 숏폼들이 쏟아진다. 뉴미디어 공론장의 현실이다.

 

분명한 것은 소셜미디어가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소셜미디어는 외로움을 달래고 소통을 나누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자기만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장소다.

현재 내가 머문 곳은 그 중간의 어디쯤인가에 있다.

삶은 끝없이 변화하는 것일 텐데, 나는 아렌트의 길과 바우만의 길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가게 될까.

쉰을 한참 넘었는데도 새로운 모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성지연 작가·'다시 만난 여성들' 저자

 

출처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