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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詩와 글과 사랑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마법, 걸언(乞言)

by maverick8000 2023. 6. 5.

 

이은영 사회복지사

 

총리를 지낸 한 어르신의 일화를 읽은 기억이 있다.

총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고 “어머니께 걸언한 후 답을 주겠다”고 답했다는 것.

본인의 나이가 이미 칠순을 넘었을 때이니 모친이 살아 계시다면 백세에 가까운 연세일 텐데 굳이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겠다는 말에 상대방이 의아해한 것은 당연했을 터였다.

어머니께 여쭙는다 한들 당연히 “그리 하라”고 하셨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답이 yes인가 no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우선하는 마음, 집안의 어른을 존중하는 마음, 그 마음의 표현이 바로 걸언이기 때문이다.



‘걸언(乞言)’. 사전적 의미로는 ‘어른에게 뜻을 여쭙다’, ‘상대방에게 의견을 청하다’는 뜻을 가졌다.

노인요양시설에서 일할 때 이 일화를 접하고 사회복지사로서 ‘걸언’을 노인복지 실천의 가치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어르신과의 대화방식을 바꾸어 서비스의 과정과 내용을 설명하고 어르신의 뜻과 의향을 물었다.

예를 들면 “점심 식사 드세요”가 아니라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지금 준비해 드려도 될까요?” 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상대방의 의사와 선택을 묻는다. 식사와 관련된 선호와 기호까지 귀담아듣겠다는 의지를

매 순간 걸언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결정의 권한이 어르신께 있음을 매 순간 알려드리는 것이다.



작은 변화인 것 같지만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나다.

걸언 하면, 어르신은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해 ‘알 권리’를 충족함과 동시에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게 된다.

걸언하면, 모든 서비스가 시설과 직원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적으로 결정하신

것이 되고 어르신을 서비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리게 된다.

걸언 하면, 혹여 서비스에 불만족하더라도 마찬가지 걸언의 방식으로 본인의 뜻을 말씀하게 만든다.

“밥맛이 없어”가 아니라 “요즘 입맛이 없고 오늘은 국수를 먹고 싶은데 한그릇 말아줄 수 있겠나”하고

말이다. 주체적이고 존중받은 인간은 상대방 역시 존중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나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행복이기에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부모 세대를 부양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가족의 책임’이라는

응답이 1988년 89.9%에서 2014년 31.7%로 급감했고, 반면 ‘사회에 있다는 응답이 2%에서 51.7%로

크게 늘었다.

2020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실태조사 결과는 더 놀랍다. 65세 이상 인구의 78.2%가

노인 단독가구(독거+노인 부부)이며 자녀와 함께 동거하는 경우는 20%도 되지 않는다.

자녀와 동거를 희망하는 비율도 점차 줄어들고 있어 향후 노인 단독가구의 증가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40세 이상 응답자의 경우 자신이 노인이 되었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받겠냐는 물음에 절반 이상의

응답자가 ‘노후 돌봄은 집이 아닌 노인요양시설에서’ 보내게 될 것이라 예상했고 ‘자녀의 돌봄을 받겠다’는

응답은 1%에 불과했다. 더 이상 자녀 세대가 내 노후의 삶을 돌봐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대부분 응답자가 건강이 악화하였을 때, 연령이 높아질수록, 신체적 기능에 제한이 생겼을 때 더 많은

사회적 돌봄이 필요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사회적 돌봄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부모 세대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노년을 위해 ‘같이 돌보고 스스로 누리는 사회적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노후에 어떤 서비스를 받기 원하는가, 어떤 돌봄이 좋은 돌봄인가. 서비스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길 바라는가. 좋은 돌봄, 품격 있는 사회서비스 문화를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할 때이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걸언’의 정신은 너와 나를 함께 높이는 역설을 실현한다.

오늘 만나는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걸언의 소통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서로서로 주인공으로 만들어 보자.



출처 : 강원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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