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662 봄의 반대편에서 사방에 벚꽃이 그득하던 4월이었다. 나는 꼭 스무 살이었고, 대학에 입학한 지 두 달여 만에 만사가 귀찮아진 참이었다. 뭔가 다른데.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도둑맞은 기분으로 학교를 오가자니 봄날도 봄꽃도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던 구에게 연락이 온 건 그때였다. 구는 내게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시간을 길게 뺏으면 미안하니까 내가 너희 학교로 갈게." 약속 시간보다 일찍 찾아온 구가 본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단조롭게 꽃잎을 흘리는 벚나무와 통나무 벤치와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거기 팻말처럼 꽂혀 있는 구가 이상하리만치 어색했다. 이전의 구는 늘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어두운 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꽉 조여 묶은 채.. 2025. 5. 2. 꽃과 잎새 벚꽃이 비처럼 내리던 날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프러포즈하는 연인을 보았다.오래전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각자의 연인이 있는 두 남녀가 붐비는 뉴욕의 백화점에서딱 하나 남은 장갑을 동시에 잡은 채, 한눈에 반해 서로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반나절을 함께 보낸 후, 끌림과 죄책감 사이에서 여자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그녀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후 남자에게 책을 헌책방에 팔겠다고 말한다.책이 돌고 돌아 당신에게 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세렌디피티’는 우연한 발견이나 행운을 뜻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각자의 연인과 헤어진다.남자는 이후 7년이나 책을 찾아 헤매는데 엉뚱하게 이 책을 누군가에게 우연히 선물받는다.“우리가 함께 책방에 갈 때마다 당신이 이 .. 2025. 5. 2. 법정에 선 건 아들인데 대답한 건 어머니 “피고인 이름이 김민수 맞습니까?”“네, 맞아요.”피고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판사의 질문에 대답한 건, 서른 살 김민수씨 본인이 아니었다.피고인석 근처 방청석에 바짝 붙어 앉은 머리 희끗한 아주머니였다. “피고인, 직접 대답하세요.”“아유, 우리 애가 영 숫기가 없어서. 이런 데 처음 나와보는데 얼마나 무섭겠어요.”“피고인 어머니십니까?”“판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얘가 세상 착한 앤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과장 하나 없는, 실제 내가 목격한 일이다.아주머니는 경위에게 붙잡혀 끌려나가듯 퇴정하면서도 아들을 위해 필사적 변론(?)을 계속했고,피고인은 고개를 떨군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친의 행동이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정말로숫기가 없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 2025. 5. 2.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초, 몹시 추운 겨울 밤, 미국 뉴욕 빈민가의 야간 재판소에 남루한 행색의 노파가 끌려왔다.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절도죄였다. 왜 도둑질을 했냐고 묻자, “병들어 누운 딸과 굶주린 두 손주를 먹여야 했다”며 고개를 떨궜다. 고민하던 판사는 10달러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정이 술렁였다. 돈 한 푼 없는 노인에게 벌금이라니….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한 방청객들을 향해 판사가 입을 열었다. “빵을 훔친 것은 범죄입니다.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빵을 훔칠 수밖에 없도록 방치한 이 비정한 도시의 모든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판사는 자기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모자에 담은 뒤, 법정 내 모든 이가 50센트씩의 벌금을 내는 데 동참할.. 2025. 4. 30. 아름다운 말과 마음이 희망이다 요즘 뉴스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과 챗GPT(지피티)다.우리나라에서도 직장인들이 매일 챗GPT를 사용하며 정치인들도 ‘정책’을 자문한단다. 조선 숙종 당시의 협객 장길산을 주인공으로 10년에 걸쳐 대하소설을 쓴 황석영 작가는최근 인터뷰에서 “당시에 챗GPT가 있었으면 정말 몇달 만에 쉽게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한 여성 기업가는 챗GPT로 자료 수집은 물론 사주도 보고 고민 상담도 한단다.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챗GPT는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읽고 감성적이고 따듯한언어로 위로를 해주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존재,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시스템이각 분야 전문가들은 물론 부모·친구·선생님, 심지어 연인의 역할까지 한다니 인간이 곧 .. 2025. 4. 30. 콩나물시루 안에서 빛이 들지 않게 검은 천으로 덮인 시루 속에서 콩나물은 자란다. 햇살도 온기도 없이 어둡기만 한 공간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을 맞으며 키를 높인다. 사람의 마음에도 그런 구석이 있다.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고, 외면한 채 가둬 둔 감정들.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 표현하지 못한 분노, 속으로 삭이며 넘긴 억울함처럼 밝은 곳에서는 자랄 수 없는 마음들이 있다. 그 감정들은 음지에서만 뿌리를 내린다.세상은 종종 양지바른 곳에서만 마음이 자라는 것처럼 말한다. 웃음, 성취, 긍정적인 말과 다정한 손길이 마음을 건강하게 키운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자양분이지만 세상은 그 반대의 경험 또한 잊지 않고 안겨준다. 소중한 대상을 잃고 남은 상실의 자리, 눈을 질끈 감게 하는 후회의 순간.. 2025. 4. 30. 스무 살 이후를 사는 건 기적이다 봄은 끝났다. 가는 봄은 곧 돌아올 봄이다. 앞으로 무심히 오는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맞을까 헤아려보다가 일순 정신이 아득해진다. 하얀 양파 뿌리 같은 봄비 며칠. 활엽수엔 새잎들 돋아 초록이 짙어지는데, 작약과 모란의 꽃망울이 생기는 계절은 이토록 풋풋한데 나는 어쩌자고 쓸쓸한가? 나는 아무런 꿈도 야망도 없이 술과 담배, 포커도 배우지 못한 채 고작 시나 쓰던 청년이었다. 어쩌다 김소월, 다자이 오사무, 에릭 사티 같은 자멸파 예술가에게 마음이 홀려 그들을 흠모하며 따랐을 뿐이다. 그 젊던 날엔 앞날이 안 보이고 현실은 팍팍했으니 살기에도 죽기에도 애매했다. 끝내 미치지도, 하룻밤 새 유명해지지도 않은 난 새벽에 헤르만 헤세나 알베르 카뮈의 번역 소설을 뒤적이다가 먼 데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 2025. 4. 30. 테니스 회원 모집 자~ 테니스 회원을 모집합니다..아래 테니스장에서 운동하실 분선착순으로 모집합니다.. 연회비는 우리 방 회원님들께만 할인하여특가로 연 100억원에 모십니다..항공료, 숙박비, 부가세 등은 별도입니다.구장 밖으로 떨어진 공은 줏어다 드립니다.. 대학시절 테니스 회원은 우대함~!!! 2025. 4. 23.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을 오가며 감당이 불감당이다. 이번 달에는 돈을 또 얼마나 냈는지.밀려드는 청첩장과 부고장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제 저녁에는 상갓집에 들렀고오늘은 결혼식장에 간다. 다음 주에는 경조사가 많아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스럽다.다들 인생 중대사이니 어디 한곳 빼먹을 수가 없다. 일정 관리하는 로드 매니저를 둬야 할 판이다. 어느 결혼식장. 또 뷔페야? 누가 좀 갖다주면 안되나? 음식 찾아 삼만리도 힘들지만뷔페 음식은 자꾸 먹게 된다. 음식을 보면 욕심이 난다. 돼지 되기 십상이다.우아하게 앉아서 서빙받으며 먹었으면 좋겠는데. 대부분 결혼식은 뷔페다.디저트 과일까지 해서 아마 일곱접시는 먹은 것 같다. 울 아내가 나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 딱 하나.뷔페식당에 가면 돈이 아깝지 않단다. 어쨌든 국수로 마지막 입가심까.. 2025. 4. 23. 나는 반딧불 오랫동안 힘들고 고단했던 무명 시절을 겪던 한 가수가 ‘나는 반딧불’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무명 시절에 약 5개월간 노숙한 적도 있다. 옥상에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환풍기 앞에 종이를 깔고 자고, 라디에이터가 켜진 화장실에서 눈을 붙이면서도 음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반딧불’은 우연한 기회에 알려졌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소개된 그의 노래는 청취자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그의 사연과 더불어 깊은 울림을 줬다.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그의 인생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수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과 위로를 선사했다. 노랫말은 단순한 곡을 넘어 삶의 이야기이자 위로의 시가 됐다.어떤 이들은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운도 수많은 고통을 이겨낸 시간과 .. 2025. 4. 23. 영 이상한 말 느지막한 오후가 되니 학원차를 기다리는 보호자들로 아파트 입구가 북적거렸다.마침 도착한 태권도 학원차에서 아이를 받아 안은 보호자 둘이 횡단보도에 와 섰다.그들은 차가 떠나자마자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새로 온 선생이 예전 선생에 비해 아이들 돌보는 요령도 없고 고지식하다는 것이었다.“내내 운동만 가르치니 애들이 얼마나 재미없어 하겠어? 우리 애는 벌써부터학원 안 다니겠다고 난리야.” 그러니까요, 하고 맞장구를 치며 다른 사람이 답했다.“사실 우리가 정말 태권도 가르치자고 학원에 보내는 건 아니잖아요.”영 이상한 말이었다. 태권도 학원에 보내면서 그걸 가르치는 게 목적은 아니라니.초등학생의 경우 하교 마중과 학원 등원, 하원까지 책임져 주는 학원들에 보호자가 어느 정도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 2025. 4. 23. 결혼식 주인공은 나야 나 결혼식 갈 일이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하나는 내 나이다. 더는 결혼 적령기 친구들과 일할 기회가 잘 없다. 장례식 갈 일만 는다.다른 하나는 낮은 혼인율이다. 결혼 적령기 친구들과 일을 하더라도 결혼하는 친구가 잘 없다.어떤 이유로든 비극이다. 오랜만에 결혼식 갈 일이 생겼다. 십 년 전 직장 후배다. 후배에게는 첫 직장이었다.10대 티를 갓 벗은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웨딩드레스 입은 걸 보자 눈물이 났다.딸 시집보내는 아비 마음이 뭔지 마침내 알게 됐다. 결혼식은 모던하고 단정했다. 웃기는 주례사는 없었다. 오글거리는 친구들 춤사위도 없었다.“첫날밤 가즈아” “반품 거절” “신랑 친구 보러 옴” 같은 자기들 딴에는 웃긴다고 쓴 문구가 적힌화환도 없었다. 주인공은 오로지 신부와 신랑이었다. 요즘.. 2025. 4. 23. 이전 1 2 3 4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