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407 빨래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보리차를 우렸다. 얼음이 잘그락거리는 보리차를 한 모금씩 마시며 베란다 너머를 바라봤다. 쨍하게 쏟아지는 늦여름의 햇볕 아래, 모든 것이 제 밑에 짙은 그림자를 붙여두고 있었다. 빨래라는 행위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물을 잔뜩 머금어 묵직해진 면직물이 세탁조 안에서 둔탁하게 부딪칠 때마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의 잔여물도 세찬 물살에 쓸려가는 기분이 든다. 모터가 내는 저음이 그치고 맑은 알람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에 들러붙은 묵은 잡념들도 말끔히 씻겨 나가는 상상을 했다. 요 며칠 무얼 해도 즐겁지 않고 별것 아닌 일에도 쉬이 지치는 날들이 이어졌으므로, 그것은 꽤 괜찮은 종류의 명상이었다.탈수를 마친 이불과 베갯잇을 품에 안아다가 건조대 위에 펼치며 탁,.. 2026. 8. 26. 예쁜 말로 포장한 불행 요즘은 영 빛을 못 받고 있다. 프리랜서라서다. 거의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생긴 일이다.빛을 못 쬐면 비타민D 합성이 줄어든다. 뼈와 근육에 문제가 생긴다.비타민D 영양제를 열심히 먹는다. 별 소용 없겠지만 마음은 좀 편하다. 빛을 못 쬐는 사람이 또 있다.히키코모리(ひきこもり)다. 사회와 단절된 청년들을 일컫는 일본말이다.일본과 한국은 참 다른 데도 닮은 데가 많다.현해탄 건너 유행하는 사회문제는 몇 년 뒤 꼭 여기서도 유행한다. 한국서 ‘왕따’가 된‘이지메(いじめ)’가 대표적이다. 히키코모리도 한국말을 찾았다. 고립·은둔 청년이다.긍정적으로 대체할 말을 찾다 보니 만든 단어다. 그것도 부정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경기도는 이 단어도 바꾸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투표로 대체어도 선정했다.‘숨은 빛 청년’.. 2026. 8. 26. 김정운의 소통의 심리학 현재 김정운박사가 거주하는 전라남도 여수의 서재..이곳의 2만여권 책들이 AI에 밀려 장식품이 되어 버렸다는 푸념을 하는 김박사의 강의가 흥미롭다.. 2026. 8. 25. 전작권 전환, 지휘할 장군이 없다면 무슨 소용 전시 작전 계획을 논의하는 화상 회의에 한 지휘관이 보이지 않았다.주어진 질의에 참모가 계속 답변하길래 지휘관을 찾자, 화면 밖에서 “저 여기 있습니다” 하며 얼굴을 비췄다.자신이 없어 참모를 대신 답변하게 한 것이다. 먼 나라 군대 이야기가 아닌, 우리 군 이야기다. 군에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장교에게는 병과가 있고 장군에게는 직능이 있다.영화 속 장군은 모든 걸 파악해 결정하지만 현실의 장군은 인사, 작전, 군수, 정책 등 전문 분야가 나뉜다.같은 보병도 작전은 전쟁 계획에, 인사는 병력 관리에, 군수는 보급에 수십 년 한 우물을 파는 식이다.별을 달았다고 모든 분야에 통달한 장군이 되진 않는다. 갈고 닦은 전문성의 총합이 실력이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정부와 여권이 전작권 전환을 다.. 2026. 8. 25. 농협이 대체 뭐길래 1961년 (구)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의 통합으로 출범한 농협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 조직이다.농기구 공급이나 농산물 유통을 넘어 금융·보험·주유소·마트에 이르기까지 전국 1100여 지역 농·축협과4800여 지점망으로 모세혈관처럼 뿌리를 내렸다.거대한 영향력의 상징 중 하나가 농민신문이다. 주 3회 발행되는데 촘촘한 구독망에 힘입어한국ABC협회 유료 부수 인증에서 전국 신문 5위권에 오를 정도다. ▶자산 700조원, 30여 개 산하기관 및 계열사 수장의 인사권을 쥔 농협 회장은 ‘농민 대통령’으로 불린다.그러나 1988년 민선 도입 이후 7명의 회장이 예외 없이 고초를 치렀다.3명은 횡령이나 뇌물 수수 등으로 중도 사퇴했고, 1명은 임기 마친 후 당선 무효형을, 나머지도임기 중 수사와 감사를.. 2026. 8. 25. 완행열차의 추억 대학생이던 1987년 여름, 당시 가장 느린 완행열차였던 비둘기호를 타고 대전에서 부산까지여행한 적이 있다. 열차 시간표는 분명 6시간쯤 걸린다고 써 있었지만 실제 타보니 10시간이 넘었다.새마을호로 두 시간 반, 지금의 고속철도로는 한 시간 반 만에 갈 거리였다.부산에 도착하니 말 그대로 파김치가 됐다. ▶비둘기호는 목적지까지 가는 중간에 있는 모든 간이역에서 정차했다.그때마다 보따리를 짊어진 할머니, 책가방을 맨 학생들이 타고 내렸다.상급 열차인 통일호와 무궁화호·새마을호가 지날 때마다 먼저 보내주느라 대기 시간도 엿가락처럼 늘어났다.대신 사람 구경을 실컷 했다.에어컨이 없어 열린 차창 밖으로 새마을호를 탔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세상 풍경이 느리게 펼쳐졌다. ▶완행열차에 깃든 이런저런 사연은 대중가요가.. 2026. 8. 24. 우리는 꽃불이라네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이라 치면, 인류는 고작 2초 전에 등장한 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물론 나는 그 숫자의 참과 거짓을 따질 만큼 부지런한 인간이 아닐뿐더러 그 이야기가 진짜든 가짜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때론 과학적인 정확도보다, 사유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다주는 의미가 중요하니까. 2초, 기막히게 짧은 순간이면서도 기분 좋은 허탈함을 안겨준다. 인류가 불을 피우고, 교향곡을 작곡하고, 인공지능을 만들어낸 사건들이 고작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니. 웃음이 가볍게 새어 나왔다. 100년도 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찰나인 걸까. 1만분의 1초쯤 되려나.눈가의 주름 한 겹만 봐도 가슴이 찌르르해지는 부모와의 만남도, 타인과 연대하며 나누는 우정과 사랑도 지구의 타임라.. 2026. 8. 20. 삶의 매무새 토마토와 호박 수확이 줄었다. 텃밭 농사도 이제 끝물이다. 시들시들해진 것들을 하나씩 뽑아낸다.마당이 한결 말끔해졌다. 손에 흙을 묻히기 전에는 그저 저절로 줄을 맞춰 자라는 줄 알았는데,흙과 식물에도 저마다의 매무새가 있다는 걸 배운다. 이웃들이 담 너머로 우리 집 텃밭을 훔쳐보면 정리 안 된 집 안을 들킨 것처럼 부끄럽다.잡초는 뽑아도 계속 번지고, 이웃을 따라 세운 지지대는 제멋대로 기울어진다. 어째서 다를까.남의 집 텃밭을 보면 괜히 질투가 난다. 특히 옆집이 그렇다.아담한 고랑을 둘러싸고 핀 자잘한 꽃들과 기분 좋은 그늘을 드리우는 보리수나무까지 밭을 참 예쁘게도 가꿨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옆집 할머니가 매일 밭을 돌보셨다. 할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진 이후론 딸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데, 허리를.. 2026. 8. 20. “세상에, 인스타그램은 마약이야” 2020년 미국 콜로라도주 여고생이었던 애널리 쇼트는 1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스타그램, 틱톡에서 끊임없이 또래 여자아이들의 외모와 비교했고 ‘스스로 못생겼다고 느낀다’고 일기에 썼다. 그의 부모는 딸이 사망한 뒤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열어봤다가 딸이 겪은 고통을 알게 됐다. SNS가 추천한 피드는 불안, 우울, 자살 관련 글로 도배되어 있었고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과 같은 내용이 떴다. 애널리가 심리적으로 취약해진 순간을 포착해 SNS는 조회수를 올리고 광고를 보게 하고, 결국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메타는 애널리를 먹잇감으로 삼은 그 알고리즘으로 돈을 벌어 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3년 전 호주 언론이 메타가 광고주를 대상으로 13∼17세 청소년을 공략하는 광고 전.. 2026. 8. 20. 법조인만큼 욕 잘하는 직업도 없다 “우발적인 분노의 표현은 모욕죄의 모욕 행위라고 보지 않습니다.즉, 씨X새끼는 모욕죄지만 씨O은 아니라는 겁니다.” 며칠 전, 생활 법률 강연을 하다가 예시를 하나 들었다. 앞줄에 앉은 청중들의 불안한 시선이 느껴졌다.점잖은 자리에서 너무 찰지게 욕을 했나? 근데 사실 이 정도는 욕도 아닌데. ‘법조인의 언어생활’에 대해 사람들은 잘못된 환상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영화나 드라마 속 판검사, 변호사들을 보면 차분하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일상에서도 몇 조 몇 항, 하면서 법조문을 습관처럼 인용한다.마치 살아 있는 법전처럼 딱딱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니 기계나 AI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법조인 중에 실제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대한민국 모든 직업군을 모아놓고 .. 2026. 8. 20. 백살 넘은 천연기념물 무궁화 현존 국내 최고령으로 알려진 강릉 사천면 방동리에 심어진 무궁화 나무. 1900년 전후로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나무의 뿌리목 둘레가 146㎝로 현재 알려진 국내 무궁화 중 가장 굵다. 무궁화가 활짝 피었다.아침에 피어난 무궁화 꽃송이는 저녁에 송이째 지지만, 이튿날이면 다른 꽃이 화사한 얼굴을 내민다.한 그루에 천 송이 넘는 꽃이 핀다는데, 여름 내내 피고 진다.그래서인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애국가 가사가 광복절이 있는 8월에 잘 어울린다. 무궁화는 기념식수로 자주 심어졌다. 여기저기에 무궁화동산도 많다.하지만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무궁화는 딱 한 그루다. ‘강릉 방동리 무궁화’다.2011년 강릉과 백령도의 무궁화가 한 그루씩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지만, 아쉽게도 백령도 무궁화는태풍으로 고.. 2026. 8. 20. 나의 형 미겔에게 나의 형 미겔에게 형! 오늘 난 툇마루에 앉아 있어.형이 여기 없으니까 너무 그리워.이맘때면 장난을 쳤던 게 생각나. 엄마는우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지. “아이구, 얘들아…”저녁 기도 전이면늘 술래잡기를 했듯지금은 내가 숨을 차례야. 형이 나를 찾지 못해야 하는데.마루, 현관, 통로.그다음에는 형이 숨고, 나는 형을 찾지 못해야 해.그 술래잡기에서 우리가울었던 게 생각이 나.형! 8월 어느 날 밤,형은 새벽녘에 숨었어.그런데 웃으며 숨는 대신 시무룩했었지.가버린 시절 그 오후의 형의 쌍둥이는지금 형을 못 찾아 시무룩해졌어…벌써 어둠이 영혼에 내리는걸.형! 너무 늦게까지 숨어 있으면 안 돼.알았지? 엄마가 걱정하실 수 있잖아.- 세사르 바예호(1892~1938) * 남아메리카 페루 시인, 라틴아메리카 시.. 2026. 8. 19. 이전 1 2 3 4 ··· 20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