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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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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인연 오랜만에 안부 문자를 보내려 휴대전화 연락처를 넘기다 손가락이 멈췄다.한때 늘 점심을 함께 먹던 옛 동료,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한참씩 이야기하던 옛 이웃,해마다 새해 인사를 보내던 대학 후배.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그때는 이 사람들과 멀어질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잘 지내는지 궁금하면서도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화면을 껐다.그 순간 가수 이찬원이 부른 ‘시절인연’의 노랫말이 떠올랐다. “가는 인연 잡지를 말고 오는 인연 막지 마세요.” 곱씹을수록 오래 남는 노랫말이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은 본래 선가에서 모든 일은 때가 무르익어야 드러난다는 뜻으로 쓰던 말이다.요즘은 사람 사이의 일에 더 자주 쓴다. 직장을 떠나면 동료와, 이사를 하면 이웃과, 졸업을 하면선후배와 .. 2026. 10. 22.
계시 좀 주세요 나는 무교다. 모태신앙도 부태신앙도 없다. 어머니는 몇 년 전 가톨릭 신자가 되셨다.사람은 나이가 들면 뭔가 믿을 것이 필요해진다.젊은 시절 믿었던 자식이 믿음직스럽지 못한 꼴로 늙어갈 땐 더욱 그렇다. 나는 종교를 싫어하지 않는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종교 없이는 설명조차 할 수 없다.물론 여러분은 종교를 부정할 수는 있다. 종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모택동도 스스로 종교가 됐다. 종교를 인정하는 것과 신을 인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오랫동안 나의 영웅은 전투적 무신론자인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였다.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환각이라는 ‘만들어진 신’의 저자다.과학은 신과 양립할 수 없다는 그의 믿음이야말로 나의 종교였다. 요즘은 잘 모르겠다.과학자들이 뭘 새로 발견할 때마다.. 2026. 10. 22.
빈방 / 조정인 빈방 / 조정인 누구라도 한때 엄마가 있었어요엄마라는 말 참 좋아요, 기슭을 적시며 헤적이는곡우 무렵 밤물결 같은 나는 지금 뒤늦게, 북아현동 산 7번지 언덕길, 성에 낀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빈방을 듣고 있어요길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방엔 삼십촉 전구가 켜져 있고늦도록 재봉틀을 밟는 엄마가 있어요 자니?등 너머, 말 이전의 망설임이 돌아누운 어깨를가만가만 어루만지던 깊은 겨울밤 옆 사람 숨소리를 셀 수도 있는 그런 단칸방어깨를 돌리면 바로 품을 파고들 수 있었는데그때, 나는 무슨 일로 더욱 몸을 웅크려 이불깃에 얼굴을 파묻었을까요 소리 죽인 울음을 다 받아내던 엄마가 이윽고 다시 묻던자? 아니, 대답하고 돌아눕기만 하면 되는 거리등 뒤엔 엄마가 있었는데 나는 영영 대답하는 일을 마치지 못한 채등.. 2026. 10. 20.
캪틴큐의 귀환 “술 마신 다음 날 숙취가 없는 술?”이라는 우스개 질문의 주인공은 캪틴큐였다.“마시면 다음 날이 사라지고 다다음 날 깨어나기 때문”이었다.80~90년대 고교 소풍 날 김밥 도시락 밑에 숨겨 가 산중턱 바위 뒤에서 몰래 돌려 마시던 술,대학가 MT에서 고급 양주 상자에 담겨 장기자랑 1등 상품으로 나오던 술이 바로 이 녹색 병뚜껑 양주였다.프로야구 초창기 경기가 마음에 안 들면 그라운드로 던진 빈 병도 캪틴큐였다.뱃사람의 술인 럼을 상징하는 ‘선장(Captain)’에 품질을 뜻하는 ‘큐(Quality)’를 붙인 거창한 작명과 달리유흥가 가짜 양주의 불법 밑술이라는 불명예까지 얻었다. ▶캪틴큐가 탄생한 1980년은 1인당 국민소득 1700달러 안팎이었다.값비싼 위스키는 언감생심이라 서양 독주 기분을 내려 .. 2026. 10. 20.
귀여워야 산다 귀엽다는 말을 들었다. 마른 시절에는 들어보지 못한 소리다. 살이 찌고 나서야 가끔 듣는다.이건 포유류의 특징 중 하나다. 살이 찌면 뭐든 좀 더 귀여워 보인다.사람들이 살찐 고양이를 뚱냥이라 부르며 애호하는 이유다. 귀엽다는 말은 중년 남자가 들을 수 있는 최상급 칭찬이다.그 외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칭찬은 기껏해야 “머리숱이 아직 촘촘하시네요”라거나“눈썹 숱이 아직 진하시네요” 정도일 것이다.정부 탈모 관련 공약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귀여움은 생존에 도움이 된다.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은 동물을 떠올려보시라.남반구에는 코알라가 있다. 북반구에는 판다가 있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만 먹는다.판다는 대나무만 먹는다. 딱히 영양가도 없는 음식이다.그들은 움직이기 싫어 근처에 있는 것만.. 2026. 10. 14.
머뭇거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장래 희망을 적는 란에 세 가지를 적었다.첫째는 국어 교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그만큼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다.둘째는 야구 선수. 야구를 좋아하고 그럭저럭했지만 취미였을 뿐 선수가 될 수는 없었다.셋째는 작가. 글 쓰는 걸 좋아했다. 서술형이라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언젠가 저의 글이 국어 교과서에 실려 제 아이가 그걸로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셋 중 하나를 그럭저럭 이루었다.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고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창비)에 내 글이 한 편 실렸다.‘AI의 시대에 다정함(인문학)은 왜 필요한가’를 논증하는 글쓰기 편에 수록됐다.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자못 경건한 마음이 되었다. 잊고 있던 꿈을 이루어주겠다는 메일이었던 것이다.수락 답신을 보내며 대단히 설렜다. 그 .. 2026. 10. 12.
시니어의 품격이 묻어나는 목례 길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난 중학생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얼른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혔습니다. 그런데 혼이 났습니다. "어찌 안경도 안 벗고 인사하나." 50~60년 전, 예절을 중시하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우시지요. 당시 예법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예절의 기준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사를 잘 안 해." 가끔 듣는 말입니다.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해할 만합니다. 젊은 사람은 연장자에게, 직원은 상사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이 우리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인사는 반가움을 전하면서 관계의 질서를 확인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젊은 사람들은 정말 예의가 없어진 것일까요? 비판할 것은 비판해.. 2026. 10. 11.
해방조개 마을이 드문드문 들어선 시골이라지만 주소나 전화번호 없이 대뜸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있다. 내가 몸소 겪은 일이다. 2010년 가을께 긴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와 부모님 산소를 찾았다.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고향의 냄새를 호흡하고 나니 문득 최근 낙향했다던 삼촌을 뵙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잠시 머뭇거리다 집사람에게 의향을 전했더니 “그게 되겠어?”라는 답이 돌아왔다.어쨌든 길을 나서 전북 부안 변산 해수욕장으로 접어들었다.외가가 있었음 직한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고가도로가 나 있었다.운전하며 상상했던 원두막의 풍경, 솔가지 사이로 불어오던 서해의 바람이 뚝 끊겼다. 거기서 북으로 십리상거에 살던 외할머니의 동생이 생각나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을씨년스럽게 비가 내리는 길거리엔 왕래하는.. 2026. 10. 11.
신나는 괴짜 바꿀 때가 됐다. 이메일 주소 이야기다. 내 이메일 주소는 groovyfreak다. ‘신나는 변태’라는 뜻이다.변태는 너무했다. 좀 정제해서 해석하자면 ‘신나는 괴짜’다.어떤 회사 이메일 계정을 쓰는지는 밝힐 수 없다. 후보는 뻔하다. 이메일 주소를 만든 건 30대 초반이었다. 당시 운영하던 블로그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그렇다. 세상에는 블로그라는 게 있었다. 소셜미디어가 탄생하자 금방 사라졌다.내가 쓰던 서비스도 사라졌다. 소셜미디어 짧은 글도 몇 년 지나면 부끄럽다.블로그 긴 글은 치명적으로 부끄러웠을 것이다. 이메일을 보내다 생각했다. 신나는 괴짜라니,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그때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어렸다. 어릴 때는 뭐든 조금은 더 신이 난다.누구든 자기가 좀 괴짜라고 생각한다. 중2.. 2026. 10. 8.
청약통장 헛된 꿈 1977년 3월 서울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에서 한 복부인이 시동생 등 주변 사람 이름을 빌려100건의 청약을 넣었다. 잠실의 한 아파트는 입주 전 주인이 15번 바뀌기도 했다.정부는 그해 8월 무주택자에게 국민주택을 우선공급하는 청약제도를 만들고, 이듬해 민간 아파트에도 적용했다.무주택자를 골라 돈 대신 순서대로 줄을 세우는 것이 우리 청약 통장의 출발이었다. ▶세계적으로 드문 청약 통장 제도는 고도성장기 한국 경제의 숨은 엔진이었다.집 지을 돈이 부족했던 국가는 국민이 매달 붓는 쌈짓돈을 모아 주택 건설 자금으로 썼고,정부는 당첨자에게 시세 차익을 안겨줬다.가난한 나라가 국민의 저축과 기다림을 밑천 삼아 아파트를 지어 올린 셈이다.취직하고 결혼하면 통장부터 만들던 시절이었다. 십여 년을 꼬박꼬박 부어.. 2026. 10. 8.
적막한 숲속에 평생 묶인 '몽몽이'…처음 풀어준 날 죽었다 제주서 '1m의 삶' 밭지킴견 산책해주는 유재연 소설가…"개들 세상은 사람이 넓혀주는 만큼" 지난 5월, 소설가 유재연씨가 제주 숲길을 운전할 때였다. 차창 밖 숲에 무언가 허연 게 보였다.나무 밑에 하얀 개가 묶여 있었다. 근처에 주인이 있었다. 60대 남성이었다.유씨가 다가가 만져보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안 됩니다. 가세요"라고 거절했다.개는 배가 불룩했다. 어딘가 아픈 게 분명했다. 신경이 쓰였다. 컴컴한 밤, 불빛 하나 없는 숲을 유씨가 다시 찾았다. 후레쉬 불빛으로 개를 비추었고 눈을 마주쳤다.고독과 두려움에 짓눌린 눈이었다.군고구마와 개껌을 들고 열흘 동안 밤마다 그 개를 찾았다. 개는 순순히 받아먹었다.머릴 쓰다듬자 얼어붙었다. 유씨는 개에게 이름도 지어 주었다. '몽몽이'라고.. 2026. 10. 5.
내가 모르는 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들쥐’는 3년간 은둔생활을 하다 하루아침에 신분을 빼앗긴 소설가 제문재(류준열 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름도 얼굴도 똑같은 누군가는 바깥세상에서 문재의 행세를 하며 돈, 인간관계, 소설가라는 직업까지 그의 삶을 통째로 훔쳐간다. 빈털터리가 돼 집에서 쫓겨난 문재는 그제야 자신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닫고 사채업자 노자(설경구 분)와 함께 의문의 존재를 쫓는다. 매회 궁금증을 자아내는 긴박한 추적극은 지난 8월 말 공개된 지 2주 만에 전세계 넷플릭스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본 비영어 쇼 부문 1위를 차지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서사의 큰 줄기는 인생을 빼앗아간 누군가를 향한 복수이지만,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키워드는 ‘진짜’와 ‘가짜’다. 손톱을 먹은 들쥐.. 2026.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