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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아버지의 언어

by maverick8000 2024. 4. 4.

 

 

내 기억의 최대치를 끌어 올려 보았을 때.. 나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없다.

그 흔한 '아빠'라는 소리 한번을 못해봤다.

아버지는 늘 무서웠다. 눈을 부릅 뜨면 호랑이 눈처럼 보였다.

 

목상(木商)을 한 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집을 찾았다.

엄마가 연탄불에 석쇠를 얹고 꽁치라도 구우는 날이면 그게 아버지 오는 날이었다.

그날은 계란찜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쩌다 한번 온 아버지는 씨익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오는 날은 꽁치라도 먹을 수 있어 좋았지만, 아버지와 나만 겸상을 하고

엄마는 부뚜막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그게 늘 미안했다.

 

어느날 엄마가 아버지에게 욕설과 함께 뺨을 맞는걸 본 적이 있다.

본처의 아들인 큰 형이 시골에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첩(妾)인 엄마가 

아이를 소홀히 대한다는 이유였다..

겨울에 따뜻한 물이 귀했던 시절.. 나는 형이 세수하고 남은 구정물에 세수를 했다..

 

아버지가 내 기억에도 생생한 '좌골 신경통'이라는 병에 걸렸다.

걷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허리 디스크였던 것 같다.

엄마는 아버지를 업고 용하다는 한의원에 다녔다.

결국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아버지는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마친 후 교실까지 따라 들어 와

그 비좁은 의자에 나와 함께 앉아서 담임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귀가하셨다.

그날 아버지와 엉덩이를 맞대고 함께 앉았던 짧은 시간이 내 기억의 유일한 접촉이었다.

입학시험 봐서 들어간 나름(?)의 명문고에서 다시 특수반에 뽑힌 막내아들이 대견해서 였을까...

 

그날 저녁 아버지는 서울에서 교통사고로 돌아 가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

나는 장례를 치른 후에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어떤 느낌도 갖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꿈에 거의 매일 나타났는데 아버지는 따뜻한 표정으로 날 안아주셨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 꿈을 꾸는게 싫지 않았지만, 내 허리가 급격히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는 무당의 말을 듣고 굿을 했다. 내 허리는 거짓말처럼 나았다.

무당의 말처럼 아버지가 나를 자주 쓰다듬어 주어서 그랬을까...

 

 

많은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되었다. 아니 '아빠'가 되었다..

혈기방장한 군인이었던 나는 나의 아버지와 같이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큰 아이 중학생 때 깨달았다..

꿈에서 본 아버지의 행동이 아버지의 과묵한 본 마음이었을지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충격적인 깨달음은 내가 군(軍)에서 전역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모에게서 언어를 배운다.

단순히 말을 하는 언어 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언어도 배우고 습득한다.

말이든 행동이든 그 사람의 언어를 보면 그의 과거가 보인다.

사람은 평생 말과 몸의 언어를 쓰면서 살아 간다.

그 언어를 통해 인간 관계가 형성된다.

나는 아버지와 엄마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

해서 결혼 후에도 상당기간 가족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더 많은 세월이 지나 나의 아이들도 각각 일가를 이루고 슬하를 벗어난지 오래다.

이 시점에서 나의 언어는 어떤가 돌아 본다.

부드러운지, 온유한지, 뾰족하지 않은지, 날 선 칼은 아닌지....

 

늦게라도 신(神)에게서 달란트(talent) 를 받을 수 있다면,

이제 남은 여생 동안만이라도 관대하고 온유하며 나와 남을 사랑하는 따뜻한 언어를 구(求)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