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29개국 15만건의 성인 데이터를 분석한 대규모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75세까지 13개 정신질환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을 경험하는 경우가 2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21년 미국국립정신보건원에 따르면 18~25세 청년 세 명 중 한 명이, 26~49세 네 명 중 한 명이
정신질환을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문제가 뭐 그리 많을까?’ 의아해 하실 수도 있습니다.
주말 오후, 지하철 한 량에 100명 정도의 승객이 타고 있다고 해볼까요. 확률상 이 지하철 한 칸에는
지난 1년 동안 알코올사용장애를 보인 사람이 8명, 최소 2주 내내 우울감을 느끼는 주요우울장애는 7명이 됩니다.
이 지하철 한 칸에는 1주일에 3회 이상 3개월 넘게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장애 5명,
특정 대상에 대해 병리적인 공포를 느끼는 특정공포증 4명, 기이하고 특이한 취미와 외양을 보이는
‘조현형’ 성격장애 4명, 주의력 및 충동성 문제를 보이는 ADHD 3명,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 3명, 사회와 동떨어진 ‘조현성’ 성격장애 3명씩도 있을 것입니다.
그 지하철 한 량에는 절대 적지 않은 인원이 정신건강문제와 분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은 다들, 괜찮지 않습니다.
정신질환의 원인에 대한 설명에는 그간 변천이 있었습니다.
한동안은 ‘노력과 의지의 문제’였으며 이십여 년 전부터는 ‘뇌의 문제’라는 설명이 각광받았습니다.
이런 생물학적 접근은 환자들이 보다 과학에 기반한 치료를 선호하게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미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소장이었던 토마스 인셀의 환멸 섞인 고백처럼, 이런 움직임은
‘멋진 과학자들이 멋진 논문을 출판하는 데’ 기여했을 뿐, ‘자살을 줄이고, 입원을 줄이고, 질병에 걸린 수 천 명의
회복을 개선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많은 연구자와 임상가들은 고민을 거듭하였고, 최근 들어서는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노력과 나의 뇌를 막아서는 ‘주위환경의 문제’를 함께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뇌를 내실 없이 웃자라게 하는 아동기 학대와 빈곤,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완벽주의적 압력,
젊은 세대의 무력감과 우울감에 실제로 큰 영향을 미치는 기후변화, 사회가 부조리하고 공정치 않다고
느껴질 때 빠져드는 냉소주의와 번아웃, 깊은 사유를 방해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상향 비교를 반복하게
하는 소셜미디어 콘텐트, 자기조절력이나 도덕성을 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 차별과 혐오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 심지어 자신만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라 강조하는 여러 상업적 목적의 메시지들과
‘패스트푸드 명상’까지. 누군가는 ‘약해 빠져서 정신질환을 경험하는 것’이라 쉽게 말하지만, 실은 쉽게
눈치채지 못하고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장치들이 개인을 자꾸만 정신건강문제에 취약하게 길들여 왔습니다.
정신건강문제의 뉴 노멀은 이것입니다. 실은 다들 괜찮지 않습니다.
그리고, 뇌와 환경의 문제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에야 정신건강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개입이 시작됩니다.
뇌의 문제는 정신건강전문가들이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습니다.
다만 가능한 이른 시점에, 가능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여러 증상으로 오랫동안 헤매고 있을 때 사회는 개인을 비난하기 쉬워지고 이들을 다시 밖으로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정도의 개입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얼렁뚱땅 해결되는 문제였으면 이런
정신건강 위기가 오지도 않았겠지요.
환경의 문제는 국가와 사회 시스템에서 구축해야 할 안전망이 가장 기본입니다.
누구에게나 실패할 수 있고, 절망할 수 있고,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수없이 보아왔듯 재난과 사고,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은 우리에게 별안간 찾아옵니다.
이때 자기만의 회복의 시간을 가지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때까지 버텨주는 사회의 시스템이 작동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질환 당사자이건, 가족이건, 혹은 그 어떤 증상도 없는 소위 ‘갓반인’(정신질환자와
대비되는 일반인)이건, 정신질환을 버티는 힘은 연결감에서 시작됩니다.
‘저 사람과 나는 다르지 않다’는 근본적인 연결감과 유대감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불행으로 고꾸라져 지하철 그 100명 중 한 명으로 무력하게 앉아있대도,
내가 잡았던 그 손들이 차례로 연결되어, 다시 나를 일으킵니다.
출처 : 중앙일보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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