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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보석(珠)과 보석상자(櫝)

by maverick8000 2023. 12. 8.

 

초(楚)나라에 보석 장수가 있었다. 귀한 보석을 목련 나무로 만든 상자에 잘 넣어 정(鄭)나라에 팔러 갔다.

마침 보석을 산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비싼 값을 치르고 보석을 산 사람은 보석은 필요 없다며 돌려주고,

보석을 담은 나무 상자를 소중하게 들고 돌아갔다. 그 사람은 보석보다는 보석 상자가 마음에 들어 산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매독환주(買櫝還珠), ‘보석 상자(櫝)만 사고(買) 보석(珠)은 돌려줬다(還)’는

내용의 고사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잠시 시간을 내보자.

 

 

일단 정나라 고객의 어리석음이다. 비싼 보석을 보는 안목은 없고, 그 보석을 싼 빈 껍데기 상자에 집착해

큰돈을 낸 정나라 고객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매독환주’를 설명한 대부분 글에서도 이와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본질(質·질)은 못 보고 허상(紋·문)만

보는 세태를 풍자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보석은 아름답고 중요한 것이고, 보석 상자는

보석을 싸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초나라 장사꾼이 고객 수요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다.

초나라 사람은 보석의 값어치는 알았어도, 정나라 사람이 보석보다는 잘 만들어진 나무 상자에 더욱

관심이 많다는 걸 몰랐다. 보석보다 상자를 잘 만들었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 대목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자’에서도 이런 비슷한 관점을 제시한다. 송(宋)나라 사람이 모자를 잘 만들어서 월(越)나라에 가서

팔려고 했는데, 월나라에 와보니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문신을 하고 있어 아무도 모자를 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역시 송나라 장사꾼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는 글이다.

내가 팔려고 하는 물건보다는 고객이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진짜 장사꾼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멋진 나무 상자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생일 선물을 받았을 때 선물보다는 선물을 싼 포장지의 품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포장은 선물하는 사람의 정성과 마음을 일정 정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획일적으로 아름다움의 가치를 규정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진짜 좋은 것이다.

인문학에서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다양성(diversity) 추구야말로 인문학의 가장 위대한 목표다.

내가 원하는 삶을 자식에게 강요하지 않고, 내가 믿는 원칙을 상대방에게 밀어붙여선 안된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는

‘논어’의 경구도 나의 욕망이 타인에게 폭력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꼬집는다.

 

강원 양구군 해안면에 가면 그릇 모양으로 생겨 ‘펀치볼’로 부르는 지형이 있다.

여기에 사는 농가는 무청을 잘 말려 시래기로 만든 후 전국에 판매한다. 원래 무를 재배해 내세우려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무보다 시래기가 더 귀한 농특산물이었기에 주작물이 됐다.

 

고객의 가치와 선택을 존중해야 우리 농업은 다시 살아난다. 세속의 원칙과 상식도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는 용기도 필요하다.

익숙한 것을 떠나 시대와 미래가 요구하는 가치와 경험을 사색해보자.

비싼 보석을 사서 상자 안에 묵히기보다는, 아름다운 보석 상자로 집 안을 꾸미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출처 : 농민신문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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