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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진정한 쉼, 페르마타를 아시나요?

by maverick8000 2024. 3. 5.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미국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딱 10년 전 로스앤젤레스(LA) 여행에서 프러포즈를 받고, 10년 뒤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이곳에 돌아와보자고 남편과 이야기를 했지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편은 꾸준히 여행 자금을 모았고, 작년부터 바쁜 스케줄들을 정리하며

저도 2주간의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멋진 풍경, 맛있는 음식, 반가운 얼굴들…. 일상을 떠나 맞이하는 새로운 환경이 저에게

진정한 ‘페르마타(fermata)’가 됐습니다.

 

음악 용어로 페르마타는 ‘잠시 쉬어가라’는 뜻으로 음을 두세배 늘려서 끌어야 할 때 사용합니다.

학창 시절 음악시간에 ‘ ’ 기호를 개구리 눈알이라고 외웠던 기억이 있지요.

작곡가는 밝은 느낌의 장조로 된 곡을 어두운 단조로 바꾸거나 빠른 박자를 천천히 하고 싶을 때

페르마타를 사용합니다. 가사가 있는 곡에서 숨을 길게 뱉거나 단어의 의미가 중요할 때에도

이 기호를 사용해 특정 음을 끌게 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음악 용어가 이탈리아어로 돼 있는데,

이탈리아에서 페르마타는 버스정류장을 의미합니다.

제가 로마에서 유학할 때 버스 안내방송에서 ‘라 프로씨마 페르마타(다음 정류장)’라고

아는 단어가 나오니 참 반가웠습니다.

 

버스정류장은 해 질 녘 낭만이 있습니다.

잊고 지낸 동창생을 만나기도 하고, 가슴 아프게 헤어진 첫사랑을 우연히 만날 것 같은 설렘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힘들게 앞만 보고 달려오다보니 숨이 차고 멀미가 나면

잠시 내려 숨을 고르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는 곳이니 정말 페르마타가 없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늘 타고 다니던 버스에서 잠시 내려 새로운 환경을 통해

숨을 고르고 다음 버스를 설렘으로 기다릴 수 있어서겠지요.

 

저는 다른 음악 용어 중 ‘콘 푸오코(con fuoco)’를 좋아합니다.

콘은 이탈리아어로 ‘∼을 가지고’라는 뜻이고, 푸오코는 원래 ‘불꽃’을 의미하니까 콘 푸오코는

‘불꽃을 가지고’ 즉 ‘정열적으로’라는 뜻이 되겠지요.

베토벤을 비롯한 수많은 작곡가의 곡들에 이 음악 용어가 쓰여 있습니다.

연주가 시작되지 않아도 뭔가 크고 깊고 열정적인 느낌이 들지요.

치열하게 달려온 일상일수록 더 달콤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콘 푸오코로 연주되는

음악에서 잠시 즐기는 페르마타는 느리고 부드럽게 진행된 곡에서 보다 더 빛이 납니다.

음악에 장조와 단조가 있고, 피아노 건반이 흰색과 검은색으로 돼 있듯이 세상 모든 이치가

이러한가 봅니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빛나고, 죽을 것 같지만 인내하고 버티면 반드시 여유 있고 평화로운

시간이 다가오니까요.

 

여행을 다녀오니 쌓인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바로 침대에 쓰러져 푹 자고 싶지만, 이왕 해야 하는 일이라면 콘 푸오코로 해보자 결심합니다.

샤워하고 여행가방을 풀어 빨래들을 세탁하니 마음마저 후련해지는 느낌입니다.

집 안 청소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정열적으로 열심히 해봅니다.

먼 곳까지 떠나는 근사한 여행이 아니어도 열심히 일한 뒤에 주어지는 잔잔한 음악과

따뜻한 차 한잔은 멋진 페르마타가 돼줍니다.

지금 여러분의 일상에는 어떤 악보가 그려지고 있나요?

 

 

출처 : 농민신문 [이기연 이기연오페라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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