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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아아' 말고 딴거 주세요

by maverick8000 2024. 4. 23.

 

 

또 아메리카노다. 2023년에도 판매량 1위 커피다.

스타벅스·할리스 등 국내 주요 커피 브랜드 5곳 모두에서다. 초장기 집권이다.

특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한국의 비공식 국민 음료"라고 프랑스 AFP통신은 썼다.

우리만 유별나다. 고안한 미국도 물자가 부족한 전쟁 때나 마셨지 지금은 뒷전이다.

커피 명가 이탈리아에선 '이단'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조차도 에스프레소에 물을 부었다가

"커피를 망치고 계십니다"라고 욕먹었다.

유례없는 'K아메리카노 열풍'은 어떻게 시작됐나.

여러 컵 들이켜는 이들 얘기를 들어보면 맛과 향 덕분이 아니다. 외려 경제적·사회적 산물이다.



우선 제일 싸고 대용량이다. 요즘 학생들은 공부하러 카페에 간다.

하나 갖다 놓고 몇 시간 죽치고 있으려니 이만한 게 없다. 돈 버는 직장인에게도 중요하다.

카페인을 보충하지 않고서는 선진국 중 최장 시간의 노동을 못 견딘다.

물처럼 달고 살아야 하기에 비싸면 안 된다.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보다는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다.

'헬조선'은 점심시간도 1시간뿐이다. 프랑스처럼 따뜻한 카페오레를 즐기며 정치와 철학과

예술을 토론하는 건 꿈도 못 꾼다. 밥 먹고 때맞춰 복귀하려면 호로록 흡입할 수 있는 아아가 딱이다.

고학생 입장에서도 양이 많아져 좋다. 안 그래도 '진짜 커피'에 물을 탄 건데 얼음까지 녹으면

커피인지 '커피맛 물'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빈 잔을 앞에 두고 눈치 보이는 것보단 낫다.

 

단체 주문 탓도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니랄까봐 메뉴도 웬만하면 통일이다.

수습 시절 모두가 아아라고 할 때 홀로 '카라멜 마키아또'를 외쳤다. 좌중의 눈길이 쏟아졌다.

이후 나도 한동안 '아메리칸' 행세를 했다. 역설적으로 아메리카노야말로 가장 한국적이다.

무한경쟁·빨리빨리 문화·획일주의가 한 잔에 담겼으니 가히 '꼬레아노'다.

 



돈과 시간 여유가 생겨도 여전히 아메리카노다.

이제껏 먹어온 게 그뿐이라, 다른 건 모르겠고 실패할까봐서다.

"취향은 계급을 반영한다"고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말한다. 유복하게 자라며 어릴 때부터

리스트레토도 아인슈페너도 경험해봐야 다른 훌륭한 커피도 있다는 걸 안다.

물론 지금도 아주 늦진 않았다. '외교가의 커피'로 유명한 플랫 화이트부터 시도해보시라.

지갑 얇은 소시민도 귀족 부럽지 않게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치다.

대학로를 지날 때면 학림다방에 들른다.

오른편 맨 구석 창가, 수필가 전혜린이 생전 마지막으로 앉았던 그 자리에서 비엔나커피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오스트리아 여행 땐 모차르트의 단골 카페를 찾았다.

처음 접했던 모차르트 커피의 달콤 쌉싸름함과 전통 디저트 노켈른의 부드러움은 아직도

혀끝을 감돌고 있다.

 



주변에도 '탈아메리카노'를 전파하고 다닌다.

선배가 내줄 때도 이젠 당당하게 '복자 요거트 프라페'를 고른다.

후배에게 사줄 땐 무조건 다른 거 시키라고 한다. 경제학적으로도 옳다.

아메리카노가 싫은데 주면 사회적 후생손실이다. 지출은 4500원인데 효용은 그보다 낮다.

무엇보다도, 고작 1000~2000원 차이에 진한 커피를 포기하는 삶이란 너무 씁쓸하지 않나.

 



출처 : 매일경제 [서정원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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