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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옥수수의 시간

by maverick8000 2024. 9. 10.

 

 

옥수수를 거뒀다. 작년보다 보름 늦게 심긴 했지만 마을에서 제일 늦게 수확한 셈이다.

옆 밭 어르신이 8월 중순부터 가끔 옥수수 가까이 와선 살펴보고 가셨다.

다 익었는데도 따지 않았다면 서둘러 거두라며 강권하셨을 것이다. 너무 늦게 심은 이유까지

따져 꾸짖기엔 가을 상추 모종을 심고 가꿀 마음이 바쁘셨다.

 

내 고향 경남 진해에선 봄이면 떠도는 농담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예측은 벚꽃 만개하는 날을 맞히는 것! 신중하게 군항제 날짜를 정해도,

축제 전에 꽃이 지기 시작하거나 축제 후에 꽃봉오리가 터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옥수수를 심고 기르며 깨달았다. 옥수수를 거둬 먹을 때를 예상하는 일 역시 벚꽃 피는 날을

맞히는 것만큼 힘들다는 것을!

 

옥수수는 잘못이 없고, 하루라도 빨리 옥수수 피리를 불고 싶은 초보 농부의 욕심 탓이다.

작년엔 광복절을 갓 넘긴 후 옥수수를 서른개도 넘게 거뒀다. 다른 밭에서 벌써 수확을

시작했다는 풍문도 들렸고, 달빛 아래 열을 맞춰 늘어선 옥수수를 보니, 이 정도면 충분히

자랐으리라 여긴 것이다. 벗겨놓고 보니 알이 제대로 여물지 않았다.

내 키보다 훨씬 긴 옥수숫대 그림자를 차례차례 밟으며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지만 이미 늦었다.

 

올해는 최대한 느긋하게 기다렸다. 작년 실패담을 이야기했더니 너무 늦게 따면 옥수수 알이

딱딱해서 맛이 없다는 충고가 돌아왔다. 광복절이 지나자마자 아침저녁으로 텃밭에 나가

옥수수들을 쳐다봤다. 손이 근질근질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서른세번 천천히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속삭이는 듯도 했다.

 

드디어 옥수수를 거뒀다. 옥수수수염 색깔을 여러번 살피고 한두개를 우선 따 속을 확인한 후

확신했다. 올해야말로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가장 좋은 때에 옥수수를 수확했다고.

내 몫을 챙긴 후 농사 스승께 드리고, 친지와 지인들에게도 조금씩 택배로 보냈다.

며칠 뒤 소식이 들려왔다. 무척 맛있다는 칭찬 끝에 벌레가 몇마리 들어 있다는 지적이

꼬리표처럼 붙었다. 약을 전혀 치지 않은 물증이라며 웃어넘긴 뒤, 부엌에서 때마침

껍질째 삶아둔 옥수수들을 꺼냈다. 다섯개 중 하나씩은 꼭 벌레가 나왔다.

 

깊은 밤, 삶은 옥수수를 입에 물고 텃밭으로 거닐었다.

석줄로 겹겹이 선 옥수수들이 더욱 커 보였다. 밭의 가장자리에 심었던 터라, 울타리를 따로

둘 필요가 없었다.

농사 스승은 내일 새벽에 옥수숫대를 전부 베라고 권했지만 나는 적어도 열흘은 이 풍경을

그대로 두려 한다. 꽃이 진 벚나무와 열매를 인간에게 내준 옥수수에 대해 더 생각하기 위해서다.

‘사로잡는 얼굴들’에 실린 사진들이나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에 실린 문장들을

다시 꺼내 곱씹으면서 옥수수의 시간을 좀더 길게 음미할지도 모르겠다.

미련이라면 미련이고 반성이라면 반성이겠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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