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다 보면 문득 시 한 구절이 입에서 새어 나온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정지용의 '향수' 속 마지막 구절이다. '향수'는 정지용 시인이 1923년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고향을 그리워하며 쓴 시라고 한다.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변곡점을 거친다.
그 속에서도 잘한 일과 못한 일,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은 희미하게 나뉘고, 다양한 형태의
기억들이 하나의 작은 조각조각으로 모여 앨범처럼 스쳐 지나간다.
요즘처럼 1분 1초가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코끝과 손끝에 찬 기운이 느껴질 때,
계절의 변화가 몸소 느껴질 즈음이면 문득 유년시절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들이 풍선처럼 부푼다.
필자는 경상북도 상주 시골마을 어귀에서 태어나 자연과 흙과 하나 됨을 느끼듯 자유롭게 뛰고
뒹굴며 자란 시골 촌놈이다. 학창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집 앞마당에 가방을 툭 던져놓고
친구들과 축구공을 차고, 야구공을 던지고, 개울가에서 물장구치고 수영하고, 산에 올라가고 했던
자유분방한 추억들이 생생하다.
어릴 때부터 높은 곳에서 떨어져보기도 하고, 강물에 쓸려 내려가기도 하고, 벌에게도 쏘여보고,
뱀에게도 물려보고 하는 경험들이 시골 촌사람이 아니라면 겪어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자연 속에서 커가면서 몸과 마음이 단단해진 게 지금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정도로 아주 값진 시간이었다.
필자의 유년시절은 놀이문화를 넘어 공동체 생활, 사회 그 자체였다.
친구들과 늘 같이 뛰어놀고 공존하며 그 속에서 싸우고 화해하는 경험들이 까진 피부에 새살이
돋듯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이다.
어른이 돼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더 나은 것도 어찌 보면 시골에서
자라면서 몸에 밴 다양한 경험 때문일 터. 방목하는 삶에서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으면서 성장했고,
그렇기에 행복도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다.
50년 가까이 지난 작은 조각의 기억들이지만 요즘 시대 아이들의 생활 환경과 패턴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든다. 자연과 흙에서 뛰어놀아야 하는 아이들이 빡빡한 사교육에
길들여지고, 쉴 틈 없는 학원과 과외를 시간 단위로 수행하며 마치 직장인처럼 하루 일과를 소화한다.
각박한 현대사회 그 자체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1등을 하거나 대기업에 취업하면 행복할 거라고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연애하거나 결혼하면 행복하고, 자식을 낳으면 행복하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하고, 값비싼
무언가를 구입하면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착각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만든다.
실제로 행복은 이런 것들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많고 적든 간에 스스로 만족하는 유년시절 경험
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황병우 DGB금융그룹 회장
출처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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