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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詩와 글과 사랑

오디 먹어 푸른 입 / 김신용

by maverick8000 2024. 11. 25.

 

 

 

 

오디 먹어 푸른 입

 

입가에 몽고반점이 생겼네

배냇웃음이듯 푸르게 참 푸르게도 젖었네

난생처음 내가 난생(卵生)이 된 것 같네

집 뒤, 산밭에 저 혼자 열매 맺어 서 있는 나무가 건네주는

오디 한 움큼 따 입에 넣으면, 온통 잉크빛으로 물드는데

잉크빛으로 물들어, 폐허 같은 멍자국이 번져 흐르는데

그것을 보며, 어머, 아저씨 입가에 몽고반점이 생겼네! 하며 밝게 웃는

이웃집 아이의 말 한 마디, 몸 안 가득 잠실을 차렸는지

웃음이 누에처럼 스며 나와, 사각 또 사각 베어 먹은 자국

온몸에 푸른 신전(神殿)을 세우네

그렇게 말한 아이의 얼굴에도 온통 일식(日蝕)이어서

또 웃음이 저절로 즙이 되어 흘러내려

입 속이고 입술 주위고 다시 온통 폐허가 되는

흠뻑 젖은 두 손마저 즐거운, 그 즐거운 폐허가 되는

입 속의 푸른 멍자국, 몽고반점⸺.

그렇게 폐허가 되면 보이는 입, 아이 입.

오디 먹어 푸른 저 입.

 

김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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