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좋아하는 40대 유럽 남자 R 씨가 오랜 기간 한국어를 공부하고 난생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청계천 물에 직접 손을 넣어보고 감동 먹었어요. 광장시장 원더풀! 할머니들이 친절하고 영어도 잘해요!”
칭찬 일색만은 아니었다. 사람들 목소리가 하도 쩌렁쩌렁해 귀가 멍할 때가 많단다.
마을버스를 타니 ‘대화는 속삭이듯, 휴대폰은 진동으로’ 차내 방송을 해 감탄했는데, 고성이 터졌다.
“뭣이 이리 더워. 기사 양반 에어컨 좀 빵빵 틀어요! 쪄 죽겄다!”
“아이구 놀래라!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 워쩌유! 애가 깨서 울잖아유!” “할매 소리가 더 시끄럽소이.”
하지만 그쯤은 구수한 생활 대화로 재미가 있었다. 거의 동시에 양철 지붕이 찢어지는 듯한 대중가요!
휴대전화 벨 소리였다. 우렁찬 여인의 고성 통화. 은행 문턱이 어쩌고 전세금 사기…,
머식이네 보험이 어쩌고…, 본인 재정 상태부터 친지 개인정보까지 라이브 방송을 했다.
다음 날, 지하철을 타면서 R 씨는 살짝 마음의 준비를 했다.
역시나 몇몇 아저씨가 역대 대통령 이름을 열거하며 질책성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나 R 씨는 내심 감탄도 했다. “때와 장소 구분 없이 활성화된 토론과 자유가 넘치는 나라!”
함께 막국수를 먹으면서 한마디 해주었다. “목청 큰 한국인은 극소수 몇 명이다. 오해하면 안 된다.”
그랬더니, 이 파란 눈의 꺼벙이가 되레 원주민을 가르치려 들었다.
“한국인이면서 아직 모르세요? 접촉 사고 나면 목청 큰 놈이 이긴다! 한국 사람 큰 목소리는 30년 전
본격적 마이 카 붐이 일어나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보다 한국말이 더 유창한 그가 거의 매일 나를 가르쳤다. “접촉 사고는 이미 옛날얘기고요. 지금은 아주
사소한 주차 문제로 악을 쓰죠. 아이들이 옆에서 보든 말든. 그런데 이 촉법 꼬맹이들도 또 만만치가 않아요.”
한국이 좋아 한국 문화에 흠뻑 젖었다고 하지만, 촌놈이 정말 별걸 다 안다고 난리다.
“한국인들 왜 그리 화를 자주 내죠? 택시기사가 행선지를 두 번 물었다고, 당신 치매냐? 이게 어른한테
할 소립니까. 식당에서 음식 다 먹고 고기에서 냄새가 났다, 반찬이 짜다 맵다 악다구니를 쓰고 환불받아내고!
어디 목청뿐입니까. 잘 키워 놓은 화초는 왜 뽑아 갑니까? 눈사람 만들어 놨더니 머리를 떼서 달아나고!”
듣다 보니 울화통이 터졌다. “잠깐, 잠깐! 나도 말 좀 하자! 그렇게 트집만 잡을 거면 뭐하러 한국에 왔어?”
“좋아하는 나라니까 단점도 살펴봐야죠.” “그러는 네 나라는 도둑 없냐? 범죄란 게 아예 없어?”
R 씨가 가만히 손가락 세 개를 펴들었다. 강도·절도가 한국보다 3배로 많단다. 좀도둑은 10배란다.
범죄율이 높은 것은 딱한 일인데 그 말이 왜 그리 반갑나. 나는 그만 기분이 확 풀리고 말았다.
늘 호텔 입구에 내려주곤 했는데 그날은 기분이 좋아 객실까지 따라가 둘이서 와인을 마셨다.
그가 뜻밖의 고백을 했다. 유소년 축구 코치는 취미 활동이고 그는 소도시 법원의 판사였다.
서둘러 한국 여행을 단행한 데는 판사님의 애절한(?) 사연이 있었다.
“서울 어느 빌라 건물 가스 배관을 타고 여성 속옷을 훔친 도둑이 있었지요?”
“그 뉴스가 유럽까지 퍼졌어요?”
“퍼지기만 했으면 한국에 안 왔죠. 우연인지 모방범죄인지 우리나라 소도시에도 가스 배관을 타고
속옷을 훔치는 도둑이 나타났고, 지금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제야 감을 잡았다. 매사 한국을 닮고 싶은 R 씨는 여러 판례를 참고해 한국식 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이미 메모지에 판결문 초안도 잡아 놓았단다. 내가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보여달랄 걸 보여달라 하라고
야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을 못 참는 나는 그가 비틀비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메모지를
슬쩍 훔쳐보았다. 글자 크기가 일정치 않은 볼펜 글씨였지만 또렷또렷한 한글이었다.
‘……가스 배관을 악용한 죄질이 매우 불량하나… 범행이 초범이라는 점,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에
우발적이었다는 점, 여성 속옷 2벌을 반환함으로써 피해 복구가 이뤄진 점, 장문의 반성문을 썼다는 점,
두 번 다시 여자 속옷 가까이 가지 않겠노라 맹세를 한 점 등등을 참작하여…집행유예 6월로 함.’
9박 10일 일정을 마치고 그가 한국을 떠나던 날, 공항까지 배웅을 갔다.
탑승 시간까진 여유가 있어 둘이 차를 마셨는데, 그가 불쑥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판결문 초안 아닙니까?” “가서 다시 쓸 겁니다. 기념으로 선생님 가지세요.”
“역시 그렇군요! 역시 훌륭한 판사님이십니다! 당연히 다시 써야죠!”
“며칠 동안 돌아다니면서 귀동냥 많이 했지요. 다 파악했습니다. 피의자 얼굴은 감춰 주고 피해자는
이사를 가고… 일반화됐더군요.”
“맞습니다. 큰 문제지요! 돌아가서 여자 속옷 범인, 중형을 때릴 거죠?”
“무죄 취지 파기환송할 겁니다!”
“무죄?”
“범인을 기자 앞에 너무 오래 노출시켰고, 등 뒤로 수갑을 채우는 야만적 인권침해 및 심대한 명예손상.”
“아니 그러면 도둑놈 연행하는데 꽃가마라도 태워 가겠다는 겁니까?”
“유감스럽게도 유럽에는 꽃가마가 없군요.”
손을 흔들며 탑승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강철수 만화가/방송작가
출처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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