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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by maverick8000 2023. 6. 26.

 

지난주 공원 벤치 앞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이 언쟁하는 소리를 들었다.

세 아이 중 한 명은 중재 중이었고 두 명은 계속 언쟁을 이어갔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 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내가 트라우마가

생겼어!”라는 말이었다. ‘스트레스’라는 말까진 이해가 됐지만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다소 놀라웠다.

요즘은 어린이들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 참 거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심리 상담에서나 들어볼 용어들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일상어처럼 사용되는 요즘이다.

가스라이팅, 공황장애, 트라우마 같은 용어들 말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현대인들은 수많은

심리적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삶에서 벌어지는 안 좋은 상황을 모두 상처(피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아픈 걸 모두 상처로 정의하는 순간, 나는 치료 대상 즉 환자가 되기 때문이다.

 

신경정신과 하지현 교수의 책 ‘그렇다면 정상입니다’에는 ‘생활기스’라는 말이 등장한다.

생활기스는 보통 중고품을 거래할 때 쓰는 단어로 망가진 것이 아닌 정상 작동되는 물건을 말한다.

우리도 살다 보면 상처(기스)의 순간을 수시로 만난다. 인생에서 작은 상처도 받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은 그저 덕담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울퉁불퉁한 인생에 꽃길은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음의 생활기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증상이 치명적이지 않다면 “이런 일로

더 이상 병원에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밝힌다.

치료자로서 그 마음이 백번 이해됐다.

윤석중의 동시 ‘꽃밭’은 꽃밭에 넘어진 아이가 정강이에 묻은 새빨간 피를 보고 ‘으아’ 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한참 울다 자세히 보니 그것이 피가 아니라 ‘새빨간 꽃잎’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살다 보면 상처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도 찾아온다.

피가 꽃이 되는 마법처럼.

 

출처 : 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