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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결혼의 정석

by maverick8000 2023. 9. 15.
결혼의 정석

 

 

주례가 없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준비한 글을 함께 읽으며 혼인 서약을 한다.

신랑 아버지가 등장해 기타를 치며 축가를 부른다. 며칠 전 다녀온 결혼식 장면이다.

 

참석한 하객들은 전혀 놀라운 표정이 아니다. 이미 새로운 결혼식 문화가 거부감 없이 정착됐기 때문이다.

주례자를 선정하면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고, 신혼여행 다녀오면 선물이라도 준비해 직접 가서 인사드려야

하니 시간이나 노력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다.

 

축하 연주나 노래도 역시 노력과 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효율과 단순함을 추구하는 젊은 신랑·신부들이 복잡하고 효율성 없는 절차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래서 결혼식의 불필요한 절차는 생략되고, 효율이 떨어지는 의식은 변형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결혼식의 주관을 신랑·신부가 주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가 나서서 날짜와 예식장을 잡고 청첩장을 돌리고 예식을 주관하는 결혼식도 있겠지만,

대부분 젊은 신랑·신부는 자신들의 생각과 기준이 반영된 결혼식을 한다.

 

이렇게 변화해가는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점은 결혼식 주관자(Host)의 이동 변화다.

옛날 결혼은 배필도 가능한 한 부모 기준에 합당해야 했고, 예식장도 부모의 하객들이 오기 쉬운 곳을

선택했다. 하객 대부분이 부모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례는 최대한 경력과 인성을 갖춘 인정받는 원로를 선택했고, 결혼식장에서 준비한 음식 외에 특별한

음식을 부모가 직접 만들어 하객들에게 내놓아야 비로소 부모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옛날에 결혼식은 부모가 주관하는 행사였고, 장례식은 자식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요즘 결혼식과 장례식 모두 주관자는 자식들이다.

모든 의식의 결정·실행에 자식들의 의견이 가장 많이 개입된다. 기성세대의 입김은 줄어들고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커지는 사회 현실에 딱 들어맞는다.

 

관혼상제(冠婚喪祭), 인간이 살아가면서 변화의 시기마다 치러야 할 일생의 통과 의례였다.

성인이 되고(冠),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婚), 죽어서 먼 저승길로 떠나고(喪), 남은 자들이 모여

추모하는(祭) 의식은 유교 국가에서 어느 하나라도 빠트리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의례였다.

 

의례 주관자는 일종의 권력을 갖는다. 주관자의 승인이 있어야 어른도 되고, 가정도 이룰 수 있다.

주관자의 뜻에 반하거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불효자가 되고, 망나니가 된다.

때로는 가족 구성원에서 제외돼 쫓겨나기도 하고, 부자격자로 낙인(烙印)찍혀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주관자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른의 승인이 없어도 어른이 될 수 있고, 마음대로 배필을 선택해 혼인할 수 있다.

상례는 죽은 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산 자의 상황에 따라 간소하게 끝낼 수도 있고, 추모 의식이나

제사는 얼마든지 생략할 수 있다. 주관자의 축이 이동한 탓이다.

 

주관자가 기성세대에서 젊은 세대로 바뀌는 것은 사회 중심축이 이동하는 것이다.

중심축의 이동에는 가족 해체, 권위 약화, 독자적 삶 선택 등의 사회 현상이 함께 따른다.

이런 변화를 대하는 부류는 두가지다.

 

변화를 한탄하며 마음 끓이는 부류, 변화한 사회를 인정하고 빨리 적응하는 부류. 주례가 없어도

예식은 단아하고 엄숙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당사자가 알아서 잘 결정하니 편안하다.

결혼의 정석이 있는가? 없다. 그것이 어찌 결혼뿐이겠는가?

 



출처 : 농민신문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