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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나의 부고 기사를 준비하는 법

by maverick8000 2024. 11. 8.

 

 

얼마 전 만난 모 신문사의 국장은 자기 담당이 아닌데도 부고 기사를 가끔 쓴다고 했다.

자신과 친분이나 추억이 있는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을 만나본 적도 없고 잘 모르는

젊은 후배보다는 자신이 정확하고 애정을 담아 부고 기사를 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인터넷을 뒤져 요약한 자료와는 달리 잘 쓴 부고 기사는 고인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기도 하다.

 

며칠 지나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서 부고 기사, 즉 어떤 사람의 죽음을 지인들에게 알리는

기사 담당인 제임스 R. 해거티가 쓴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란 책을 읽었다.

‘부고 전문기자가 전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란 부제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죽기 전에 스스로 부고 기사, 아니 부고를 써보라고 권한다.

남들에게 기억되는, 왜곡되었거나 뻔한 부고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했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거나 누구에겐가 들려주기엔 기억력도 흐릿하고 체력도 부족하다.

 

40여년을 기자로 활동한 그는 사람들을 인터뷰할 때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목표를 이루었는가’ 이 세가지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나 역시 기자 시절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했지만 정작 내가 이 질문을 받는다면

쉽게 답을 못할 것 같다. 그는 몇년 전부터 자기 자신의 부고, 아니 인생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탄생한 날, 부모와 조부모의 이름과 직업부터 시작해 어릴 때 가장 확실한 기억은 무엇인지,

삶에 영향을 준 사람이나 사건 등을 구체적으로 써보라고 했다.

또 무엇이 당신을 큰 소리로 웃게 하는지, 인생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 자랑스러웠던 일과

실수담 등도 솔직하게 기록해보라고 권한다.

 

 

그의 조언에 고무된 나는 노트에 태어난 날과 동네, 가족관계 등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이름은 기억나는데 할아버지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최근에 둘째 오빠와 통화하다가 할머니와의 일화나 당시 집안 환경 등에 대해 물어보니

오빠의 기억은 나와 전혀 달랐다. 심지어 난 오빠에게 구박받은 억울함만 가득한데 정작 오빠는

막내인 날 몹시 귀여워해줬다고 스스로를 미화했다.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는 나의 성장기 등을 떠올리다가 나는 내 삶의 마디마디에 나도 모르게

많은 이들의 관심, 애정 어린 조언과 격려, 기꺼운 도움을 받았음을 알게 됐다.

나의 알량한 재능과 성실함보다는 수많은 실패와 실수에도 담담하게 버틴 나의 낙천성과

회복탄력성, 그리고 둔감함 덕분에 60대 중반인 지금까지 활동하는 것 같다.

아무튼 축약한 나의 부고 기사는 이렇게 끝났으면 좋겠다.

 

“유인경은 타인의 실수에도 관대했지만 자신의 실수나 단점에는 더욱 관대했다.

외동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가장 자주 쓰는 말이 ‘그래도 다행인 건 말이야’일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을 자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자주 웃었고 남들이 웃어줄 때 행복해했다. 마지막에도 미소 띤 얼굴을 지어 보였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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