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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아갈 권리

by maverick8000 2024. 12. 9.

 

 

 

초등학생 아들을 무제한 데이터가 포함된 전화요금제에 가입시켜줬을 때, 아들이 그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아하는 모습에 놀랐다.

젊은 사람들이 ‘데이터는 인권’이라는 말을 한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권리를 깨끗한 공기와 물처럼 기본적인 권리로 여기는 것이다.

그토록 기본권이라 여겼던 것을 제한받고 있었으니 얼마나 불만이 많았을지 이해가 됐다.

 

 

반면, 나는 줄곧 ‘데이터는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현금으로 결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데이터를 써가며 삼성페이나 카카오페이 같은 모바일

결제를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길 위에서

스마트폰 데이터로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마트에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사용하지 않으면 할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관 예매나 병원 예약조차 어렵다. 용량이 큰 스마트폰을 사고, 수십개의 앱을 설치하며,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에 가입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

디지털 전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의 디지털 전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어놓은 것은 마트나 영화관·병원이 아닌

은행과 증권사였다. 개인용컴퓨터(PC)에 설치된 홈트레이딩 시스템을 계속 이용하려면

신분 확인 절차를 새로 거쳐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스마트폰 앱 설치가 필수였다.

비대면으로 인터넷 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하려 했더니 역시 스마트폰 앱 없이는 불가능했다.

다수의 고객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현실에서 은행이나 증권사가 PC 서비스를 축소하고

모바일 앱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이 기업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은 이해가 갔다.

 

하루 대부분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고, 컴퓨터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디지털 전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글프기까지 했다.

컴퓨터공학과 교수인 지인이 “사실 저는 컴맹이에요”라고 농담처럼 말했을 때, 처음에는 웃어넘겼지만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술에 대한 기초지식 부족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을 선호하지 않아서 컴맹이 되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옆 나라 일본에서 얼마 전까지 팩스로 문서를 보내고 도장을 찍으며 플로피디스크로 파일을 전달하던

관습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낯선 나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아날로그적 방식을 유지했던 덕분에 변화에 대한 적응 의지가 조금 낮은 사람들도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디지털 전환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세상을 바꾸지 말고 그대로 두자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수의 취향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약간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배려가 단지 모바일 인터넷 무료 강좌를 많이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용이 너무

크게 들지 않는다면 옛 방식과 새로운 방식이 공존할 수 있도록 기존 방식을 서둘러 없애지 않는

데까지 확장될 필요가 있다.

 

출처 : 농민신문 [김대환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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