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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사색하는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

by maverick8000 2025. 4. 14.

 

 

요즘 60분 드라마를 30분 만에 본다. 인터넷동영상서비스(OTT)의 10초 건너뛰기 기능 덕분이다.

풍경 묘사나 대사 없는 장면, 조연이나 단역들의 수다, 지나치게 잔인하거나 무서운 장면은 빨리 감아버린다.

그마저도 지루하게 느껴지면 1.25배나 1.5배 속도로 보기도 한다.

16부작 드라마를 정주행하기엔 여가 시간이 많지 않고 봐야 할 콘텐츠는 넘치기 때문이다.

 



핵심 장면들만 골라보다 보니 이젠 느린 전개를 견디지 못하게 됐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영상 콘텐츠 빨리 감기 시청 습관 관련 조사' 결과, 응답자 중 69.9%는 '빨리 감기'로 시청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드라마 곳곳에 암시 장면을 배치하면서 공들여 찍은 창작자는 허탈하겠지만 이제 속도는 대세다.

10초 건너뛰기와 빨리 감기 기능이 없는 극장에 가기 힘들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관객의 인내심과 몰입도가 떨어지면서 2시간 남짓 긴 호흡의 영화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

 

긴 중계방송에 시청률이 떨어지는 스포츠에도 속도의 불똥이 튀었다.

경기 시간을 줄이는 새로운 룰이 속속 도입되고 있다. 한국프로야구는 올 시즌부터 공격 시간을 단축하는

'피치 클록'을 정식 도입했다. 투수는 주자가 없을 땐 20초, 주자가 있을 땐 25초 안에 투구하지 않으면

볼이 선언된다. 타자도 33초 이내 타석에 들어서지 않으면 스트라이크다.



필드에서도 '거북이 골퍼'는 용납되지 않는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는 지난 시즌 플레이

속도 위반에 따른 페널티를 강화했다. 과거엔 한 대회당 '배드 타임'(샷 규정 시간 초과에 따른 페널티)이

2회 부과되면 벌금 200만원을 내야 했지만, 지난 시즌부터는 400만원으로 늘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도 올 시즌부터 골퍼에게 주어진 시간(40초 규정)을 1~5초 초과해

샷을 하면 벌금을 부과한다. 6~15초를 초과하면 1벌타를 매기고, 16초를 넘기면 2벌타를 준다.



지루하면 살아남기 힘들어진 세상에서 숏폼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우연히 짧고 강렬한 숏폼 드라마에 붙잡힌 적이 있다.

1분 안에 결혼과 불륜, 복수가 휘몰아쳤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눈을 떼기

쉽지 않았다. 숏폼 콘텐츠 중독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짧은 시간 새로운 자극을 주는 숏폼 콘텐츠는 쾌감을 전달하는 신경자극물질 도파민을

다량 분비한다고 한다. 그러나 도파민이 과하게 분비되면 우울증과 불안증 등 신경정신 질환이 생길 수

있으며 집중력이 저하되거나 기억력 감퇴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

 

 

자극은 내성이 생겨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팝콘 브레인'을 유도할 수 있다고 한다.

빠르고 강한 정보에는 익숙하고 현실 세계의 느리고 약한 자극에는 반응을 안 하는 뇌를 말한다.



특히 10대들이 맥락 없고 선정적인 영상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문해력이 저하될 수 있다.

물론 어른도 마찬가지. '도파민 노예'가 되면 독서를 멀리하게 되고 사색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초고속인터넷 시대 '느림보는 실패자'라는 인식도 일상의 시곗바늘을 재촉한다.

한국전쟁 후 압축성장을 하면서 '빨리빨리' 문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영향도 크다.

 



그러나 느림은 삶의 여유다.

속도를 늦추고 우리 주변을 돌아봐야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는다.

가끔씩 멈추고 나를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져야 새로운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서두르다가 그르치는 일이 허다하다. 빠른 것보다 꾸준하게 지속하는 힘이 중요하다.



출처 : 매일경제 전지현 문화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