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라리 죽는 게 살아있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성경에 느닷없이 튀어나온다.
"아직 살아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전도서 4:2).
사는 게 가끔은 희망 고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말에 공감하며 산 지 꽤 오래되었을 수도.
성경답지 않은 이 문장이 더 성경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읽다 보면 역시나 성경은 그 말을 뒤집는다.
사자나 개로 살 수 있다면 어느 동물을 선택하실는지? 당연히 사자이지만 다음을 읽어보자.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9:4). 전도서가 묻는 건 품격이 아니라 살아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다시 살라고 하는 성경의 말이 너무 뻔한 것 같아 짜증 나지만 그래도 살라고 하니 이상하게 안심이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건 '희망'이 있기 때문이란다.
살아있어 희망을 품으면 뭐 하나. 이뤄지질 않는데. 그냥 희망 고문 아닌가?
사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살아있는 자의 입장을 죽은 자의 시선으로 바꿔서 말한다는 것이다.
마지못해 이어가는 인생이라 해도 죽은 자에게는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러움이고,
그것만으로도 행복의 충분조건이다.
개가 살면서 불행했던 건 우아한 사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행복해질 수 있었다면 사자만 쳐다보지 않았어야 했다.
살아서 개의 부러움을 받던 사자는 이제는 죽어서 개를 부러워한다.
사자의 불행은 개의 불행과는 다르다. 죽음은 절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개 같은 인생을 살아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죽은 자들에겐 선망이다. 희망 고문마저 산자의 특권이다.
절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그 애증의 희망이 사실은 엄청난 선물이었던 것이다.
살아 숨 쉬고 있고, 삶의 희망을 꿈꾸고 있다는 완벽한 행복의 조건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마도 내가 꿈꾸는 희망을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이 항상 내가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것만을 향해 있다면 늘 고문일 수밖에 없다.
욕심은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희망이 내게 주어진 것들과 늘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즐기는 것이라면 그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개처럼 살아도, 사자처럼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여기에 있다.
기민석 목사·한국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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