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론 어떤 하루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박시헌(60)에게는 1988년 10월 2일이 그런 하루였다. 조국에서 처음으로 열린 올림픽 마지막 날,
복싱 라이트 미들급 결승전에 출전한 박시헌은 금메달을 따냈다.
대한민국 선수단에 12번째 금메달을 선사하며 종합순위 4위로 올라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환호나 찬사가 아닌 ‘부끄러운 금메달’이라는 야유였다.
86 대 32. 펀치 적중 횟수부터 큰 차이가 났다.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가 박시헌을 압도했다.
한 차례 스탠딩다운도 뺏겼다. 스스로도 패배를 직감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시헌은 뜻밖에도
심판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자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올림픽 복싱 역사상 최악의 오심으로 기록된 이날 경기를 두고 미국 선수단은 심판 매수설을 주장했다.
국내 언론마저 ‘억지 금메달’ ‘잘 치른 대회에 오점’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을 쏟아냈다.
빗발치는 질타 속에 박시헌은 "조국이 내 은메달을 빼앗아갔다"는 말을 남긴 채 쓸쓸히 링을 떠나야 했다.
그때만 해도 박시헌은 자신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금메달 도둑’이라는 굴레에 갇혀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들의 운명을 뒤바꾼 것은 두 선수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들과는 접점을 찾을 수도 없는 동독의 ‘검은손’이 숨어 있었다. 1996년 공개된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 문서에 동독이 종합순위 경쟁국인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부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동독은 금메달 1개 차이로 미국을 제치고 소련에 이어 종합순위 2위를 차지했다.

그렇게 37년의 긴 시간이 흘렀다. 원치 않던 금메달을 품고 평생 숨죽이며 살아왔던 박시헌이
최근 다시 주목받았다. 로이 존스 주니어가 자신의 SNS에 짧은 영상을 올리면서다.
2년 전에 촬영된 이 영상에는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던 존스의 체육관을 찾은 박시헌의 모습이 담겨있다.
머뭇거리던 박시헌은 주머니에서 꺼낸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존스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36년(정확히는 35년) 전 이 메달을 내가 가져갔다. 그게 잘못된 것을 알고 당신에게 돌려준다”고
말했다. 수차례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는 박시헌은 평생 자신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이렇게 내려놓았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심판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는 말이 인정받던 시절도 있었다. 모두 '오심은 단순한 판단 착오'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 체념에 가깝다.
거칠게 항의해봐야 괜히 퇴장이나 당하니, 억울해도 더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참고 뛰어야 했던 시기다.
하지만 오심은 '공정'이라는 스포츠의 기본 가치와 정면충돌된다.
열심히 노력해 땀을 흘리고 기량을 갈고닦은 선수들이 오심으로 피해를 보는 건 스포츠의 기본 정신에 어긋난다.
이제 비디오 판독 시스템 같은 보조 장치가 생기면서 오심이 현저하게 줄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오심은 존재한다.
오심도 오심 나름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순간적 판단 착오에 의한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고의나
아집에서 비롯된 오심은 스포츠의 의미를 훼손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오류를 줄여나가려는 열린 마음이다.
오심은 패자나 승자 모두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때론 그 상처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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