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가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 적이 있다.
산에 동행한 지인이 식물학을 전공한 분이라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 대나무가 나무가 아니라니. 이름 자체가 나무이지 않은가. 그랬더니 그가 설명하기를
모든 나무는 부피 자람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무는 커 가면서 점점 굵어진다. 그런데 대나무는 그렇지 않다.
대나무의 줄기 둘레는 땅속 죽순의 크기에서 이미 정해져 있다. 땅에 처음 올라온 대나무 굵기가
그 대나무 평생의 굵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말에 따르면 풀이란다. 그때부터 대나무를 보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것이 풀이라니.
아마 버섯이 식물이 아니라 곰팡이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고 난 아이들의 심정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대나무에 대한 작은 일을 하나 겪었다.
인근에 사는 사람이 집에 울타리로 대숲을 가꿨는데 가늘고 검은 빛이 도는 오죽이었다.
근처에 대숲이 거의 없었던지라 나는 그 작은 울타리 대숲이 바람에 일렁거리는 모습을 즐겨 보았다.
그 대나무들은 땅속줄기를 엄청나게 뻗어내는 등 번식력이 강했다.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영역을 넓혀나가는 대나무는 무서울 정도였다.

대숲 주인은 나에게 두어 뿌리 캐 가서 심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는데 내가 캐 갈 것 같지 않자
본인이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하더니 땅속에서 연결된 뿌리를 사정없이 삽날로 잘라버리고
한 뿌리를 캐주었다.
난 그걸 들고 와서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절대 땅에다가는 심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땅에 심었다가는 금방 그 인근이 대밭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대나무는 작은 화분에 들어와서도 잘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대나무에 꽃이 피었다. 생전 대나무 꽃은 보지 못했던 터라 마냥 신기했다.
들여다보니 무슨 보리 이삭 같은 것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꽃치고는 볼품없구나 했다.
그런데 꽃이 진 후 대나무가 시들시들하더니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대나무가 꽃을 피우고 죽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침 일이 있어 대나무를 줬던 분의 집에 가보니
그 집 대나무들도 대부분이 죽어 있었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함께 생명을 다한 것이었다.
순간 '양자 얽힘'이 떠오르기도 했다. 주인은 나무들을 말끔히 베어내고 없애버렸다.
그러고 하는 말이 한두 해 지나면 또 까맣게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래, 완전히 죽어 없어져버리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이라는 책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원고의 교정을 보는데
여기서도 대나무 이야기가 나왔다. 대나무 열매를 죽실(竹實)이라 하는데, 그걸 조선시대 허균이
벼슬을 잃고 칩거하던 중 먹고 기운을 차렸다는 이야기였다.
설명을 보니 죽실은 대꽃이 피었다 진 자리에 매달리는데 보리 이삭 같으며 껍질을 까면 쌀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 화분의 그 대나무에 매달렸던 이삭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아, 그게 열매였구나. 뒤늦게 이상했던 꽃 모양이 열매였음을 깨달았다.
책에서는 죽실을 먹고 굶주림을 면한 동학 농민군 등 역사 속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먹는 방법은 감이나 밤을 죽실과 함께 가루 내어 밥처럼 쪄 먹는 방식도 있고, 먼저 쪄서 말리고
가루 낸 뒤 한 숟갈씩 떠먹는 방법도 있는 것 같았다. 맛은 수수와 비슷하다고 소개돼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대나무 열매의 맛이 궁금해짐과 동시에 대나무가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는 정체성이
이제야 올곧이 나에게 오는 느낌이었다.
대나무에 벼나 보리처럼 이삭 열매가 맺으니 둘 사이의 친연성이 더 있어 보였다.
대나무는 풀인데, 엄청 크게 진화한 풀이며, 풀이라서 속을 꽉 채우면서 크지는 못하고 속을 비우는
방식을 택하고 나서야 비로소 덩치를 키울 수 있었을 거라는 나름의 추측을 해보게도 되었다.
나무가 되고자 했던 대나무의 모험은 숲을 이루고 수십 년을 사는 것으로는 이어졌지만 나무처럼
천년을 사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대신 대나무는 집단으로 살다가 집단으로 죽고, 다시 집단이 돼 살아나는 것으로 나름의 나무 논리를
만들어냈다.
기존의 나무는 되지 못했지만 나름의 논리를 만들어낸 대나무는 '새로운 나무'라 할 만하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출처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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