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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등기부등본 믿었는데…2억 집 고스란히 날렸습니다"

by maverick8000 2022. 11. 8.

화물차 운전사인 장모씨(42)와 아내 윤모씨(42)는 2017년 7월, 서울 화곡동의 한 빌라를 샀다.

자비 5000만원에 주택담보대출 1억3000만원을 합쳐 마련한 ‘내 집’이었다.

대출을 다 갚았을 2020년 3월 무렵 법원에서 소장이 날아왔다. 이전 집주인인 김모씨가 해당 빌라를

담보로 2017년 4월 대출을 받았는데, 등기부등본 상에 내역이 말소돼있으니 다시 회복시켜달라며

은행이 소송을 낸 것이다.

빌라에 대출이 껴있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장씨 부부는 분명 빌라를 구매할 때 깨끗한 등기부등본을 확인했다.

이전 집주인이 빌라를 담보로 받은 은행대출은 다 갚았다고 써있었고, 빌라에 어떤 근저당권도 설정돼있지 않았다.

장씨는 “분명 대한민국법원 등기소에서 뗀 등본을 확인했는데, 대출이 있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전 주인이 은행 인감 위조

8일 한국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남부지방법원은 지난해 9월 장씨 부부가 소유한 빌라에 김씨의 대출로

발생한 근저당권을 회복시키라고 판결했다. 지난 7월 대법원 3심까지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알고보니 장씨부부가 확인한 등본은 위조된 서류를 반영한 ‘부실 등기’였다.

이전 집주인 김모씨는 장씨 부부에게 집을 팔기 전 해당 빌라를 담보로 1억4280만원 대출을 받았다.

이후 실제로 대출을 갚지 않았지만 마치 대출을 갚은 것처럼 은행 인감과 서류를 위조해 등기를 바꿨다.

장씨부부는 이를 믿고 집을 산 것이다. 장씨는 “서민이 부동산을 거래할 때 유일하게 참고할 수 있는 정보가

등기부등본인데,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장씨 부부는 빌라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어버렸다.

빌라에 대한 은행의 근저당권이 장씨의 권리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은행은 김씨의 대출금 1억4000여만원을 받아내기 위해 집을 경매에 넘겼고, 집이 처분돼 나온 돈은

은행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집을 팔아서 돈이 나오면 등기부등본에 적힌 순위에 따라 관련자들이

돈을 가져가는데, 2017년 4월에 대출을 해준 은행의 순위가 같은해 7월에 집을 산 장씨 부부보다 먼저기 때문이다.

경매 절차가 완료되면 당장 내년 봄, 장씨 부부는 세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야 한다.

문서를 위조한 이전 집주인 김씨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사실상 불가능할 전망이다.

김씨는 대출금도 갚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추징할 수 있는 재산이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씨는 비슷한 유형의 사기, 사문서 위조 범죄로 7건의 재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는 "이미 돈을 돌려받는 것은 포기했다"면서도 "우리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등기부등본 하나 믿고

부동산을 거래하는데, 등본이 가짜일 수도 있다면 이 다음 집은 무엇을 믿고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장씨 부부가 매매한 강서구 화곡동 빌라의 등기부등본. 전 주인 김씨가 받은 대출로 인해 설정된
은행의 근저당권은 재판 이후 등기부등본상 순위번호 10번으로 회복돼있다.
장씨네 가족은 14번으로, 은행의 근저당권보다 순위가 밀린다.

 

  혼란한 근현대사...등기부 공신력 인정 안돼

재판에서 장씨 부부는 분명히 근저당권이 없는 깨끗한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집을 샀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법원이 등기부등본의 ‘공신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상영 법무법인테오 변호사는 “법적으로 등기부의 공신력이 인정된다는 의미는, 등기부가 실제 사실과

다르더라도 부동산을 산 사람이 이를 모른 채 거래했다면 본래 무효한 등기더라도 당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유효한 등기처럼 간주해준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공신력이 인정되지 않으면 등기부를 믿고 거래한 사람은 보호받을 수 없다.

김상철 판사 등은 2015년 사법정책연구원 보고서를 통해 “등기의 공신력이 인정되지 않는 현 제도 아래에서

등기를 믿고 거래했다가 뒤늦게 나타난 권리자로 인해 부실등기의 위험을 떠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제도는 한국의 역사적인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의 혼란기를 거치며 실제 권리 관계와 토지장부가 서로 다른 경우가 너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광복 직후 국회는 ‘등기부 등본의 공신력을 인정하긴 어렵다’고 결론냈다.

 

등기부의 공신력을 인정하는 해외 국가는 약 19개국이다. 독일은 민법(BGB) 제892조, 893조,

대만은 토지법 제43조를 통해 등기부 공신력을 명시하고 있다. 영국은 부실 등기가 발생하면 등기기관이

손해를 배상하고, 미국에도 ‘토렌스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부실 등기를 보상하기 위한 기금이 마련돼있다.

임 변호사는 “거래자는 근저당권 등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기 어렵고 등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며

”등기공무원이 실질 심사권을 갖고 등기의 공신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출처 : 한경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