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만물상]

1980년대 말 군 복무 시절, 함께 근무하던 미군이 “한국인은 전부 글을 잘 쓴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초등학교에 ‘쓰기’ 과목이 있었고,
교과서에 습자지(習字紙)를 끼워 연필로 따라 썼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타자기에 익숙해 손 글씨에 서툴다고 했다.
▶문자 발명 후 오랜 기간 손 글씨는 지식을 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 일을 하는 필경사는 인류의 첫 사무직이었다. 역사가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긴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메르 문명 전성기였던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 대왕은 ‘에두바’라는 학교를 세워 필경사를 양성했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 에즈라도 필경사 또는 서기였다.
그때까지 구전되던 모세 5경을 육필로 기록한 것이 구약의 모태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은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필사본을 통해
후세에 전해졌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산실인 수도원에 소속된 수사들 주요 임무가 필사본
베끼기였다. 이들이 하얀 양피지에 쓴 필사본을 보면 예술품 수준이다.
조선에는 필경사에 해당하는 사자관(寫字官)이 공문서를 작성했다.
명필(名筆) 한석봉이 맡았던 관직이다. 그러나 1873년 최초의 상업용 타자기가 등장하면서
필경사 직업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우리 정부에도 필경사가 있다. 대통령이 5급 이상 공직자에게 수여하는 임명장을 붓글씨로
쓰는 게 주된 임무다. 1962년부터 지금까지 단 4명이 임명됐다.
얼마 전까지 김이중 사무관과 김동훈 주무관 2명이 근무했는데 최근 김 사무관이 퇴직해
새 필경사를 뽑는다고 한다.
김 사무관은 2008년부터 15년 근무하며 해마다 임명장 3500~4000장을 썼다.
한 장에 약 20~30자가 들어가는데, 한 장 쓰는 데 15~20분쯤 걸릴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
2005년 쯤 임명장 인쇄를 해봤지만 공직자들이 손 글씨 임명장을 압도적으로 선호해
되돌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손 글씨를 써 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고 한다.
축의금, 부의금 봉투에 쓰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그 짧은 몇 글자 쓸 때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손 글씨의 힘일 것이다. ‘필경’은 ‘붓으로 밭을 간다’는 뜻이다.
임명장을 주는 대통령과 그걸 받는 공직자는 국정의 밭을 비옥하게 일궈야 할 막중한 책무를
진 이들이다. 그 진지한 뜻을 담기엔 역시 손 글씨가 제격인 것 같다.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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