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가 사라졌다

일상에도 숭숭 구멍이 뚫리기 일쑤다. 그중 어떤 구멍은 쉽게 메워지지도 않는다.
그런 구멍 중 하나가 내겐 세탁소다. 여름의 초입이었다. 땀에 전 옷가지를 챙겨 세탁소로 갔는데
10년 넘게 그 자리에 있던 세탁소가 보이지 않았다.
‘어? 이 자리 맞는데’ 하고 두어 번 길을 되짚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세탁소가 있던 자리에는 고깃집이 들어서 있었다.
이 세탁소는 우리 가족에게 그야말로 단골이었다. 내 이름은 당연히 아시고, 아내 이름도,
아이들 이름도 알았다. 한번씩 옷을 맡기러 가면 치익 열기를 내뿜는 다리미와 넓고 도톰한
다리미판 앞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편안한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한 사장님의 단골 질문은 “이제 큰애가 몇 학년 됐지?”였다.
한 해에도 여러 번 물으실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또 처음 받는 질문처럼 “중 1요”,
“중 2요” 하고 화답했다.
“아직도 딸 둘?” 하는 말씀도 자주 하셨는데 끝자락에는 꼭 “아들은 하나 있어야 하는디. 하나 더 낳아라 마.
셋도 적다” 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곤 했다. “아이고 사장님, 힘들어서 못 키워요” 하고 절레절레 엄살을
부리면 “지들이 다 지 밥그릇 갖고 나온다. 걱정하지 말아라. 금방 큰다” 하시며 출산을 장려했다.
사람 심리가 희한해서 그런 말씀을 듣고 나면 삶의 무게가 살짝 가뿐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무거운 일상도 돌연 살 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른의 말이라니.
하루아침에 단골 세탁소를 잃어버리고 다른 곳을 알아봤지만 마뜩지 않았다.
길 건너 부자들만 사는 고층 아파트 상가에 옷을 맡겼다가 깜짝 놀랐는데 명품 전문이라 그런가
기존 가격의 세 배가 나왔다. 시골쥐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카드를 내밀면서도 ‘이 가격 맞아요?’ 하고
따져 묻지는 못했다. 괜히 얼굴 붉히기도 싫고 동네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받기도 싫었다.
옷가지를 챙겨 나오면서 ‘다신 안 가’ 하고 씩씩 분을 내뿜는 것이 고작이었다.
명품 전문 말고 일반 옷 전문이면 충분한데 되레 그런 곳이 없다니. 앱을 깔아 모든 서비스를 이용하는
‘온라인 세탁소’도 이용해 봤는데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곳엔 마실 나가는 기분도, 농담도, 어른의 말도 없어 서운했다.
한 시인은 럭셔리한 삶이 뭐냐는 물음에 ‘단골집이 많은 삶’이라고 했다.
모든 감각이 편안하고 또 편안해지는 곳. 환대의 미소만으로 마음이 데워지고 사람 대 사람으로
정겨운 곳. 단골집이 사라지는 것은 일상에 구멍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일 같다.
출처 : 동아일보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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