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울고 있다. 거실의 구석진 자리에 놓인 테이블.
어머니는 그 작은 테이블에서 강의를 준비하고 온갖 고지서를 처리했다. 테이블은 책상도 식탁도 아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나이가 들고, 오늘은 울고 있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나는 날이다.
아들은 기숙사로 가져갈 제 물건들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뒤늦게 어머니를 발견한 아들이 왜 우시느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대답한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그러고는 “네가 떠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 나서 갈 줄은 몰랐다”고
서운해한다. 두 번의 이혼과 세 번의 결혼,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해 교수가 되고,
남매를 대학생으로 키워낸 여자. 곡절은 많았으나 나름 잘 살아낸 인생이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 제 인생에서 “내 장례식만 남았어!”라고 호소한다.
“왜 미리 걱정을 해요, 40년이나 앞당겨서?” 아들은 이해를 못 한다.
어머니는 고개를 내젓는다.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영화 ‘Boyhood’(리처드 링클레이더 감독, 2014)가 끝나갈 무렵에 나오는 장면이다.
2002년부터 해마다 1주일씩 12년간 대본 없이 촬영한 필름으로 유명하다.
아들 메이슨 역을 맡은 엘라 콜트레인이 여섯 살 때부터 촬영을 시작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의
시간을 담았다. 이 가족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나는 새삼 ‘다시 읽기’처럼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전에는 놓쳤으나 이제는 보이는 것들. 일테면 이 영화는 소년의 성장기라기보다 어머니에 대한
서사 같다. 영화 제목을 ‘중년기(middle age)’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소년의 상처보다
어머니에게 더 공감이 간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이 말이 심장에 쿵, 하고 내려앉는다.
남은 인생이 보이고, 그래서 공허감에 시달리는 세상 부모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대사처럼 들린다.
앞서 영화의 홀어미는 아이들 양육이 힘에 부치자 수입이 더 나은 직업을 얻으려고 대학에 진학한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나 둘째가 집을 떠날 때 그래서 어머니는 상실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재혼과 이혼을 거듭하고 교수직을 얻으며 자기의 생을 열심히 살아낸 여자 같지만 실상 그 모든 게
오로지 두 아이를 길러내는 일에 진력한 어머니로서 살았다는 고백과 다름없다.

은퇴한 선배들이 ‘아이들을 위해서만 살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아마 그 자신이 자식에게 매여 살았고, 여전히 놓여나지 못한 회한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
이 미국영화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미국 사회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부모나 자녀들이 공히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이 뚜렷하고, 이게 문화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미국 문화에 공감하는 이들을 많이 봤지만 이를 실행하는 부모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한국 부모들은 자녀의 결혼까지 부담으로 안고 산다.
다시 이야기를 돌려 중년에 맞닥뜨리는 ‘자기 인생’에 대한 질문, 양육 이후의 생에 뭐가 더 남아 있을까?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왜 사는 걸까? 어차피 사람살이라는 게 새끼 낳고 기르는 것 말고 뭐가 있느냐고
말한다면 더 고민할 게 없다. 그게 아니니까 저 어머니는 우는 게 아닌가.
인생에 대해서라면 나는 요즘 부쩍 몽상가가 되었다.
은퇴하면 돈을 털어 올리브 농장을 일궈보는 상상을 한다.
푹푹 찌는 아열대성 여름이 이제는 우리의 기후 풍토가 되었다 하니 올리브 농장을 못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열아홉 가구나 올리브 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몽상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올리브 농장을 담은 영상물을 찾아보면서 잠시 행복에 빠진다.
오십 이상 살아보고 나서 찾아드는 인생의 공허감은 아마도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그게 인생에 대한 정답인 걸까.
전성태 소설가·국립순천대교수
출처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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