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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빌런에 대하여

by maverick8000 2025. 8. 12.

 

 

E에게,

퇴사를 고민한다는 메일 읽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그 회사에 취업했는지 잘 알기에

마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이렇다 할 만한 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나마 답장을 전합니다.



요즘 악당 혹은 악역을 의미하는 빌런(Villain)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제 기억 속에 묻혔던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초년병 기자 때였습니다. 제법 긴 해설기사를 써야 했습니다.

데스크는 받자마자 찢어버립니다(손글씨로 원고지에 쓰던 시절입니다). 마감 직전 겨우 다시 제출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써야지. 이번에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복사본을 남기기 위해 먹지를 챙겨야 했습니다.



임원 시절, 그룹 정보시스템 통합계획을 CEO에게 보고했습니다.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학력 경력까지 들먹이며 화를 내더군요. 며칠 후 그룹회의에서

CEO는 의장께 말했습니다. 인수·합병 후 꼭 필요한 일이라 담당 임원인 제게 지시했노라고.

그 순간 제 표정이 어땠을까, 헛웃음이 나옵니다.

 

관리자 때입니다. 팀원 한 명이 매번 보고서 시한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간간이 물어보면 괜찮다, 제시간에 끝낼 수 있다고 했지만, 결국 말뿐이었죠.

결국 그가 맡은 일까지 미리 해둬야 했습니다.

 



경험칙상 열 명 중 한 명은 빌런입니다. 특히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전부 다 그렇습니다.

'해피 매니페스토'를 쓴 영국 경영자 헨리 스튜어트는 "오피스 빌런을 없애려면 똑똑하기만 한 문제아는

뽑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채용할 때는 똑똑함은 보여도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진짜 문제죠.



타고난 빌런은 별로 없습니다. 만들어집니다. 분위기, 상황, 구조와 시스템, 이런 것들이 양분이 되죠.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악은 괴물적인 것이 아니라,

질서와 효율,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한다고 했습니다.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 해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또 어떻습니까.



빌런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정면승부가 미덕이 되는 펜싱 경기가 아닙니다.

경험에서 얻은 잘 피하는 방법을 공유할까 합니다.

 

하나, 거리 유지. 너무 가까우면 물듭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이 괴물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상대를 바꾸려고 너무 애쓰지도 마십시오. 구조를 바꾸는 게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 빠를 때도 많습니다.



둘, 동지 확보.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훨씬 낫습니다. 완전한 지옥은 피할 수 있으니까요.

최소한 혼자 죽는 상황은 없을 겁니다. 타노스에 대항했던 어벤져스 영웅들도 그렇지 않았나요.



셋, 때가 되면 떠나세요. 회사에서 혹은 그에게서.

용기란 끝까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때를 알아보는 눈입니다. 조직이 당신의 자존감을 망가뜨릴 때,

의심해야 할 건 당신이 아니라 그 구조입니다.



빌런을 너무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흘려보내세요.

빌런은 늘 어딘가에 있고, 당신은 어디서든 계속 성장할 겁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 마음속에는 '나는 미워한다, 나는 사랑한다' 고 속삭이는 악마가 늘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는 그 악마를 잠재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어요, 차라리 그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빌런이 아예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슈퍼 히어로는 슈퍼 빌런의 존재 속에서 더욱 빛나는 법이니까요.



참, 앞에서 소개한 제 기억 속의 세 사람 중에서 진짜 빌런은 누구였을까요,

혹시 저는 아니었을까요.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출처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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