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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詩와 글과 사랑

가을 시 몇 편...

by maverick8000 2022. 9. 6.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추일미음 /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계는 붉은 물이 들었지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녙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녁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