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추일미음 /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계는 붉은 물이 들었지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녙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녁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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