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품위 있는 삶

by maverick8000 2025. 9. 5.

 

 

나는 제법 긴장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매주 목요일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하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상담사와 별것 아닌 소소한 대화를 나눌 뿐이라는 점이 쉬웠고, 대화의 시작과 끝이

전부 나로 귀결된다는 점이 어려웠다.

얘기를 이어갈수록 나 자신이 낯설어지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가끔은 유리창에 비친 나를

서먹한 심경으로 마주하기도 했다.

나는 그다지 편치 않은 의자에 앉아 나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끝없이 얘기했다.

더는 얘기할 게 없지 않나 싶어질 때 상담사가 물었다.



"미래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또한 낯선 질문이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을 적어내던 때에나 미래에 대해 상상했었다.

어른이 된 뒤로는 매일매일 오늘을 살아내기 바빴다.

미래라는 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반드시 오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전에 했던 문장 검사에서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고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한다는

지적을 받은 참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우아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미래에 품위 있고 우아한 노인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나름대로 적절한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담사의 얼굴이 모호했다. 어쩐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그건 정말 노력이 필요한 일이에요."

 

 

친구가 내 얘길 듣더니 대뜸 부자가 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가난한 독거노인은 우아할 겨를이 없다면서 말이다. 친구는 우아한 취향과 우아한 집 평수에 대해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책을 읽으면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면 말이야, 일단은 수집한 책을 쌓아둘 공간과

소파와 햇빛이 필요하잖아? 침대랑 책상이랑 냉장고, 화장실 들어가는 문까지 주먹밥처럼 뭉쳐진 곳에서

여유가 나올 것 같아? 결국 부동산과 돈의 문제야."

품위는 그런 게 아니지 않을까. 내가 묻자 친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답했다.

"일단 부자가 돼. 가진 게 아주 많아진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미래는 어렵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미래에 되고 싶은 것보다는 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자꾸 떠올랐다.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고집불통의 노인, 오만하고 게으른 성격의, 쉽게 남을 질투하고 흉보는

노인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가진 것이 많아야 하는 걸까.

부자가 되려면 지금까지의 노력만으로는 힘들 것 같았다.

다음 목요일에 상담사를 만나면 장래 희망이 보통의 노인으로 바뀌었다고 말해야지.

보통의 노인이 되려면 몇 평짜리 집과 얼마만큼의 저금이 필요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의 삶과 품위 있는 삶의 경계를 정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하찮아지진 않아야겠지, 하고 마음먹었을 때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까 한 말은 취소야." 친구가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돈 많은 인간치고 품위 있는 인간을 별로 못 봤어."



목소리 뒤로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나도 보고 있는 채널이었다.

뉴스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조작한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비싼 집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몰수당할 처지에 놓이자 어떤 거짓말과 추태를 일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쉼 없이 보도했다.

친구는 말했다. "네가 지키려는 게 돈이 되면 안돼." "그럼 뭘 지켜야 하는데?"

"글쎄다, 신념이나 철학이나 인간성, 뭐 그런 거 아닐까?" 잠시 고민하던 친구가 가볍게 말했다.

"그럼 일단 삶에서 네가 지키고 싶은 게 뭔지부터 정해야겠다." 다시 원점이었다.

상담사가 왜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품위 있는 노인이 되는 것은 정말이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출처 : 매일경제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래층 찬송가에 분노하기  (0) 2025.09.08
끝 집 할머니  (0) 2025.09.05
아침 인사  (0) 2025.09.04
의심스러운 전화, AI가 거른다  (0) 2025.09.04
세상의 모든 딸  (2) 202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