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개비처럼 옹기종기 붙어 있던 단층집들이 허물어졌다. 한 시대를 통째로 갈아엎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집 건너편, 유명 건설사가 짓기 시작한 아파트는 눈대중으로 세어봐도 30층은 족히 돼 보인다.
누군가의 꿈과 욕망을, 필요와 불안을 재료 삼아 쌓아 올린 견고한 건물은 프리미엄이라는 새 이름으로
다른 시대를 열었다. 지워진 옛 동네의 정경 위로 내 집 마련, 시세차익, 부동산 정책, 대출금리 따위의
단어가 연달아 떠올랐다.
평화의 시대에 태어나 윤택한 나라에서 자라고 자애로운 부모를 만난 것. 내게 주어진 천운에
늘 감사하며 살지만 오랜 날 간직해온 소망이 하나 있다.
매일 흙을 밟고 석양을 보며 오색빛깔 숲에 물들어 사는 삶. 땅에서 움튼 정서가 들꽃처럼 피어나는
그날을 매양 꿈꾸면서도, 나는 한 번 더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콘크리트 숲에 머물기로 했다.
새로 옮길 작업실을 찾아 며칠째 고층 빌딩 사이를 오갔다.
한껏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일까 말까 한 빌딩 틈에서 바람은 다른 길을 찾아 돌아나가고,
1억5000만㎞를 달려온 햇살은 눈부시게 튕겨 나갔다. 시선을 멀리 두며 얻을 수 있었던 심상도
일부의 몫인 듯하다.
조각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이 더 좁아 보여서 우리 땅을 비유했던 금수강산은 이제 한식집
이름에나 더 어울릴 것 같다는 혼잣말이 싱겁게 튀어나왔다.
마천루의 기다란 그늘 속을 터벅터벅 걸으며 김경미 시인의 ‘오늘의 결심’을 떠올렸다.
와락 끌어안고 싶은 음악처럼, 두 눈에 새겨넣고 싶은 그림처럼 마음에 수놓은 시.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사방팔방 하늘에 닿을 듯 솟은 건물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이 시를 끌어안고 지낼 것 같다.
그래, 더 환한 등을 밝히기보다 작은 별빛을 오래 바라보리.
더 밝히지 않아도 충분히 빛날 수 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도.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출처] - 국민일보

오늘의 결심 / 김경미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데서 살지 않겠다
이른 저녁에 나온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두 개의 귀와 구두와 여행가방을 언제고 열어두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상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티끌 같은 월요일들에
창틀 먼지에 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내 혀 물리는 일이 더 많았다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내 목에 적힌 목차들
재미없다 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한계가 있겠지만 담벼락 위를 걷다 멈춰서는
갈색 고양이와 친하듯이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을 닮아보겠다
- <현대시> 2010년 7월호 / 시집 『밤의 입국 심사』(문학과지성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