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컷
나는 추억이 적다. 우리 언니는 서너 살 때 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나는 중·고등학교 동창이 들려주는 학창 시절 내 얘기도 처음 듣는 것 같다.
더 고약한 것은 반갑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상대가 어디서 만난 누구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난감할 때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살아온 날들이 쌓일수록 기억은 점점 더
성글어지는 것 같아 서글프고, 이 때문에 무심하거나 무례한 사람이 될까봐 걱정이다.
이런 염려의 감정은 망각을 기억의 결여, 혹은 실패라 여기기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지에 집중하지, 무엇을 잊는지에 대해서는 무감하다.
기억을 주요 주제로 삼아온 인지심리학이나 뇌과학에서도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굳건해지며,
회상되는지에만 집중했다.
잊는다는 것은 사진의 빛이 서서히 바래가는 것처럼 시간에 따라 기억이 사라져 가는 과정으로 생각돼왔다.
망각은 정말 기억을 잃어버리는 부정적인 걸까? 그렇지 않다.
최근 10여 년 연구들은 망각이 역동적인 뇌의 기본 작동원리로 쓰임새가 있으며 심지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망각은 '오버핏(overfit)'을 방지한다. 오버핏이란 인공지능(AI) 등에서 어떤 모델이 데이터를
지나치게 잘 학습해 해당 데이터에 대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정확도를 보이지만 새 데이터에 대해서는
예측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과학습 현상이다.
기존 정보에 대한 과도한 기억이 새로운 것에 대한 대응을 약화시키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수능 시험날 어려운 문제 앞에서 쩔쩔맸던 기억을 그날의 공기, 시험을 치른 장소,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까지 세세하게 간직한다면, 앞으로도 긴장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기 어렵다.
망각은 이런 오버핏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잊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망각은 불안의 조절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 않은 상황에서 기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당시의 불안이 지속되거나
더 심해질 수도 있다. 뇌의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인 가바(GABA)는 전두엽이 일화적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를 억제해 원치 않는 기억을 지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연구한 케임브리지대 뇌인지과학자 앤더슨은 뇌의 적극적인 망각 기능을 연구해서 항불안제의
기전을 이해하고, 공포증, 우울증, 그리고 조현병에 대한 더 좋은 치료 가능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때다.
원치 않은 실패나 사람으로부터 얻은 상처들을 떠올리며 이 시간이 어떤 기억의 경로를 지나게 될지
막막할 수 있다. 동시에 그 사이 소소한 성취나 뭉클했던 감동의 기억을 붙잡고 싶기도 할 것이다.
어떤 경우건 너무 염려하지 말자.
망각은 기억하지 못함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적응하며 살아가게 하는,
뇌가 우리를 지키는 힘이니까.
김채연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뇌인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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