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처음 쓸 때보다, 고쳐 쓸 때 더 집중해야 한다.
자칫 어설프게 고쳤다간, 그나마 나쁘지 않던 초고마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난 4년간 혼신을 쏟은 소설의 수정 작업을 개시하는 날. 힘차게 시작하려는데, 문자가 왔다.
5분 뒤부터 2시간 안에 신용카드가 배송된다는 것이었다. 쓰던 카드가 만료돼 어쩔 수 없이 새 카드를
신청한 탓이다. 시끄러운 집에서는 작업할 수 없으니, 신경이 곤두섰다.
어서 카드를 받아야 글을 쓰러 나갈 텐데….
한데, 두 시간을 기다려도, 세 시간을 기다려도 배달원은 오지 않았다. ‘오늘은 오지 않는구나’라고 여기고,
소설을 고치러 갔다.
오전을 허탕 친 걸 잊으려, 오래도록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고 작업을 시작하려고 온 신경을 집중한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최민석씨! 집에 계시죠?”
마치 내가 아직도 집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묻는 어투에, 울분을 토해내고 말았다.
세 시간 동안 당신을 기다렸노라고, 그래서 이제는 집에 없다고! 배달원은 난감해했다.
우편함에 카드를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길을 잘 몰라서….”
“대체 얼마나 헤매면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수령 예정인 카드가 12시 반에 도착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아버지는 지난해 폐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경제적으로는 죽음 같은 벼랑에 몰린 채 살았다.
나는 아버지가 하는 사업에 명의를 빌려줬다가, 그 일로 고소를 당했다. 고소장의 내용에 따르면,
원고가 요구한 금액은 내가 평생을 벌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달 내 수입을 그에게 건네면, 86세쯤 그 막대한 돈의 수렁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 송사를 3년간 겪었고, 승소할 때까지 나는 깊은 우울증을 앓았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야 했으니, 그는 돈 때문에 벼랑에 매달린 내 손에 의지한 셈이었다.
그때는 폐암 판정을 받기 전이었으니, “제발 무슨 일이라도 하시라”고 했다.
아버지는 실은 이미 여러 일을 알아봤다고 했다. 하나, 모두 거절당했다고 했다. 주유원도, 음식 배달원도,
택배 기사도…. 그중에 바로 ‘신용카드 배달원’이 있었다.
거절한 쪽은 ‘고령의 어르신들은 실수가 잦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내 귀에 울린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라는 말은 분명 노인의 목소리였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부탁했다. 집 앞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라고. 그러고 작업하던 카페에서 나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 간밤에 눈이 내려 길이 꽁꽁 얼었다.
그 와중에 뛰려니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도착하니, 배달원은 언 발을 동동 구르며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한 대로, 아버지보다 고작 몇 살 젊어 보였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최고령의 나이대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라며 잔뜩 주름진 얼굴을 숙였다.
어쩌면 벼랑에 몰린 아버지가 간절히 바라던 일은 연신 사과를 쏟아내는 일이었다.
전화로 건넨 내 말에는 얼마나 많은 원망이 담겨 있었던 걸까.
“아닙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꾸벅 숙여 인사하니, 그의 손에 들린 여러 장의 카드 봉투가 보였다.
오늘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사과를 해야 할까.
사실 내가 소설 수정에 이토록 예민한 이유는, 내가 글을 못 쓰기 때문이다.
내 부족함을 타인 탓으로 돌린 것이다.
내 삶의 풍요가 타인의 사과로 확보된다면 그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어쩌다 타인에게 내 삶의 몇 시간도 내어주지 않는 인색한 인간이 되었을까.
이 글을 쓰려고 다시 카페로 오는데, 한 노인이 손수레에 폐지를 잔뜩 실은 채 입김을 흩뜨리며 지나갔다.
쓰는 것도 사는 것도, 쓸쓸한 만큼 춥다.
최민석 소설가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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