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주말 아침에는 TV에서 방영하는 디즈니 만화를 꼭 챙겨 봤다.
백설 공주와 신데렐라에게도 애정을 듬뿍 주었지만,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건
램프의 요정 지니였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파란색 거인의 강렬한 인상에,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 어딘가에 그가 실제로 살고 있을 거라 믿기도 했다.
‘다음 주에는 알라딘이 소원을 빌려나’ 궁금해하며, 지니에게 빌 내 소원도 신중하게 고민했다.
그 시절 어린이라면 한 번쯤 집에 있는 주전자를 문질러보지 않았을까.
나 역시 엄마가 마당에 빨래를 널러 간 사이 부엌으로 숨어들어 은색 주전자가 반질반질해지도록
광을 낸 전력이 있다.
예쁜 구두를 갖고 싶다거나 얼른 방학이 오게 해 달라는 같잖은 소원을 남몰래 속삭였더랬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담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늦어지는 거라 여겼으니까.
다만 기다림을 참지 못해서 매주 다른 소원을 빌었을 뿐.

얼마 전, 램프의 요정 지니를 각색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았다.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한국판 지니는 눈앞의 현실에 매몰되어 사느라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일러줬다.
즐거운 상상에 빠져본 지도, 내 안의 염원이 무언지 들여다본 지도 너무 오래됐다고.
터무니없는 가정이지만 가볍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지니가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한다면, 무얼 말할까. 의외로 소원은 망설임 없이 떠올랐다.
세상에 전쟁과 폭력이 사라지는 것. 기후 위기를 막아 달라는 것. 그리고 부모보다 오래 살게 해 달라는 것.
새삼 느꼈다. 이토록 명료하고 절실한 바람을 우리는 ‘소원’이라 부르고 있다는 걸.
이 마음을 선명하게 품고 살다 보면 어느 날엔가 이뤄져 있지 않을까.
소원은 단번에 성취되는 기적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다짐하며 포기하지 않고 실천하는 간절함이니까.
내 소원을 들어줄 친애하는 지니는 나 자신이므로.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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