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가고 새해가 왔습니다.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온다는 것인지…
참으로 무심하고 무상한 세월입니다. 해가 바뀌는 것은 곧 나이를 먹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종심(從心)이 벌써 지났음에도, 이맘때만 되면, 이런저런 감성이 뒤얽혀 혼란한 심경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너는 언제나 철이 들라는지”라고 나무라셨을 겁니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뜻으로 하신 그 말씀을, 지명(知命)의 나이에도 들었으니까요.
철이 든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공자는 나이 열다섯을 지학(志學)이라고 했다는데, 그분의 배움이
모름지기 인륜지수(人倫之修)요, 인생지도(人生之道)였을 터이니, 곧 ‘철이 들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철이 든다는 것 사이에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일정한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입니다.
6년간 키운 아들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고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이,
‘아버지로서의 부성이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요? 생물학적 나이가 쌓여서 그냥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른다운 노릇, 어른스러운 말 같은 것을 보여야 하는데, 그건 단지 세월과 함께 얻어지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이를테면 ‘그렇게 어른이 된다’고나 할까요?
그러고 보면, 철이 든다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같은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되어 가는 것이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던 것처럼,
어른이 되어가는 것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아래 사람에 대한 ‘자애와 포용’ 같은 것 말입니다.
최근 수십년 만에 만난 반(潘) 모 국장님은, 외모가 조금 변했을 뿐, 꼿꼿한 걸음걸이, 단정한 복장,
마를 듯한 말씨는 현직일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흔을 넘겨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연세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습니다.
건강을 놀라워하는 나에게 “내 나이가 되면, 대부분 죽었거나, 요양원에 가 있거나 할 텐데, 나는 복이
많아서, 두 늙은이가 아직도 같이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심으로 ‘평생을 나무와 숲을 가꾸며
산과 더불어 보내신 때문이 아닐까?’ 탄복했습니다.
그런 생각의 연장에서, 선배님의 오랜 추억을 상기시켜드릴 요량으로 “강원도에서 산림엑스포를
한다던데, 후배들이 찾아와서 자문도 받고 그러나요?”하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에 대해 국장님은 “자문? 내가 자문할 게 뭐가 있겠어.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잘해. 공부도
많이 하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요즘 젊은 것들이”로 시작하는 섭섭함, 하소연이
담긴 푸념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요? 후배들이 찾아오지 않은 것이 확실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국장님의 건강을 지켜온 건, 나무와 숲이 주는 물리적 에너지뿐만이 아니었던 것이죠.
참을성, 끈질김, 관대함, 연대감 등 산림이 가르치는 철학적 가치관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고 연륜이
쌓이면서 ‘그렇게 어른이 되셨던 것’이라고 하면 적정할까요? 그런 나잇값, 그런 어른다움의 마음 씀이
사모님의 건강까지도 함께 지켜드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살 더 먹었으나, 나 같은 무지렁이는 자칫 ‘철들자 망령 난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요.
그저 삼가고 또 삼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세월이 간다는 건/머리카락이 빠지듯이 그렇게/요란스럽게/말도 사라지고/생각도 사라지고/
이야기도 사라져 버려/자신마저 까맣게 잊혀지는 것//나이를 먹는다는 건/손톱이 자라듯이 그렇게/
슬며시/그리움이 쌓이고/서러움이 쌓이고/외로움이 쌓이고 쌓여서/
혼자서는 지탱하기 어렵게 되는 것’ (이공우, ‘세월 그리고 나이’ 전문)
출처 : 강원도민일보 (이공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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