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리 에세이스트
‘잘 다녀왔냐고 인사하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글쓰기 수업에서 어느 학인이 쓴 기억을 읽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기억이었다. 지병으로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던 아버지가 하루는
집에 돌아온 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다녀왔냐.” 무뚝뚝하지만 옅은 미소를 띠며 맞아주던 아버지.
찰나였지만, 그 순간의 눈빛과 표정과 말투는 평생 알고 지낸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이런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했었나 딸은 기쁘고도 슬펐다. 아버지가 아버지다웠던 유일한 순간,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헤어진 지 오래되었어도 여전히 그날이 기억난다고,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학인은 썼다.
내 이야기를 찾으려는 사람에게 기억 글쓰기를 권한다.
단 10분만이라도 세상의 스위치를 끄고 자유롭게 떠오르는 기억을 쓰자고. 기억이야말로 한 사람을
고유하게 만든다. 그 사람을 그답게 만든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기억 더미에서 나를 만든 기억을 찾는다.
떠오르는 기억들 대개는 사소하고 소소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속 찰나의 순간으로 남아 있다.
오래 살아보아도, 자주 추억해 보아도 결국 남는 것은 모래알만큼이나 작게 반짝이는 기억들.
소소소 흩어지는 기억 알갱이 중에서도 끝내 남는 기억 하나는, 사랑의 기억이다.
마지막 남은 가장 작은 기억. 그래서 가장 소중한 기억.
“그건 그리움이에요.” 가만히 일러 주었다. 나도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마주하고서야
그 기억의 이름을 알았다. 기억한다. 생각한다.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그러나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내내 기억한다. 영영 그리워한다.
진정 그리워해 본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알아낸다.
“시간이 흘러, 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요. 하루에 몇 번이고 사랑한다 표현해요.
사랑은 그때그때 말해야 해요. 우리가 언제 헤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이야기하는 학인에게,
만일 그리운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얼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땐 울음을 참느라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아버지의 인사에 울더라도 소리 내
대답하겠노라 한다. “아부지. 나도 사랑해.”
진정 그리워해 본 사람들을 만난 날이면 나도 대답하고 싶어진다.
불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머뭇거리다가 말해보았다. “사랑해.” 다섯 번쯤 말해보았다.
첫 번째는 이상했고 두 번째는 쑥스러웠고 세 번째는 간지러웠고 네 번째는 뭉클했고
마지막엔 익숙해졌다.
“사랑해.” 짧게, 애틋하게, 간절하게 사랑을 말한다. 사랑을 미루지 말자.
우리가 언제 영영 그리워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출처 : 동아일보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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