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문학 특강을 하러 어느 고등학교에 갈 일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나 혼자 강연하는 자리겠거니
생각하고 갔는데 웬걸, 학생들이 이미 무대에 올라 있었다.
그들이 준비한 밴드 연주며 연극 공연이 너무나 흥미진진하여 나는 그 자리에 간 애초의 목적도 잊고
오직 관객으로서의 역할에 몰두했다. 다음은 낭독 무대였다. 문예반 학생들이 각자 써온 글을 읽었다.
하나같이 문장 수련이 잘 되어 있고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힘 있는데다 저마다 제 식대로 자신의 글을
장악하고 있어 낭독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장면, 어디서 봤더라. 갑자기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비슷한 무대를 전에도 본 것 같은데. 언제 어디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낭독이 끝났다.
진행을 맡은 학생이 나를 불렀다. 작가님, 낭독 어떻게 들으셨나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려요.
아, 순간 기억이 났다. 언제였는지 어디서였는지도. 그러니까 저 까마득한 학창 시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였다. 작가 초청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린 날이었다.
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낭독에 참가했다.
그때 내가 읽은 글은 허먼 멜빌의 「백경」 독후감이었다. 열심히 쓴다고 썼지만 변변찮은 글이었다.
낭독을 하는 동안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장래 희망이 작가였음에도 글을 쓰면 쓸수록
재능이 없다는 회의가 들어 늘 괴로웠는데 그날이라고 다를 리 없었던 것이다.
낭독이 끝나고 초청 작가가 연단에 올랐다. 작가는 먼저 낭독을 지켜본 소감을 털어놓았다.
어떤 시가 새롭고 어떤 산문이 아름다웠는지 조목조목 이야기하더니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백경 독후감을 읽은 학생이었습니다.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그 학생은 글을 전부 외우고 있더군요. 손에 든 원고를 가끔 들여다보긴 했지만 그건 자기가 맞게
읽고 있나 한 번씩 확인해보는 거였습니다.” 나는 숨을 죽였다.
“그 학생은 글을 일부러 외운 것이 아닙니다. 그게 정말 자기 글이라서, 자꾸 들여다보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혼을 다해 썼기 때문에 저절로 기억하게 되었던 겁니다.”
모두 숨을 죽였다. 나는 더욱 뜨거워진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작가란 원래 저런 존재일까.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혼자 눈 밝게 알아보고 네 마음 다 안다고,
괜찮다고, 넌 잘하고 있다고, 그렇듯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는 사람인 것일까.
나는 실제로 원고를 전부 외우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 외운 것이 아니었다. 글에 자신이 없으니
자꾸 읽고 고치고 다시 읽고 고치기를 반복하다 보니 저절로 외워졌던 것이다.
“저는 그런 사람 편입니다. 혼을 다해 쓰는 사람, 자기 글에 정말로 애정을 갖고 다 쏟아 붓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중에 작가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 그보다 더 감동적인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나는 생각했다. 정말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저토록 근사한 격려를 해준 사람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황송하게도 먼저 내 편이라고 말해준 사람을 실망시키면 안 되는 거라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고개를 들어야지. 작가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인사해야지. 고맙습니다.
방금 그 말씀 잊지 않을게요. 꼭 훌륭한 작가가 될게요. 그렇게 눈으로 말씀드려야지.
고개를 들었다. 무대 위에서 방금 낭송을 마친 학생들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받았던 것을 이제 그들에게 돌려줄 차례였다.
출처 : 강원일보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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