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님의 침묵’ 첫머리 중)
지난 2008년 김종인 한국학 박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의 시편들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는 평론을 내놓았다. 그는 문학 평설집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서 ‘님의 침묵’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에로티시즘이라고 이야기했다.
저자는 불교의 수행은 감각적 욕망을 통제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님의 침묵은 다름 아닌 사랑의 노래”라고 정의했다.
님의 침묵 속 ‘날카로운 첫 키스’에 대한 그의 해석이 흥미롭다.
“키스는 연인 간의 원초적 성애(性愛)의 표현이다. 만해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에서 숭고함을 찾아낸다.
세속성 속에서도 성스러움을 볼 줄 아는 만해이다. 남녀 간의 사랑을 부처의 중생에 대한 사랑과 같이
보듯이 성애의 표현에서 절대 진리의 현현(懸懸)을 본다.
첫 키스란 감미로운 유희가 아니라 격렬한 만남이며 완전한 합일이다.
첫 키스의 순간 두 연인은 자신을 잊으면서 상대를 받아들이게 된다. 상대에 대한 완벽한 확인이며
받아들임이다.”
그는 에로티시즘이 님의 침묵의 근저를 이루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학자들이 이를 간과하거나
사소하게 취급한다고 지적한다. 민족의 지도자이자 선승인 만해가 사랑 타령을 하기 위해
‘님의 침묵’을 지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과 다름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이 올바른 해석을 방해한다는 논리다.
얼마 전 ‘님의 침묵’ 초판본이 1억 5100만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 낙찰가는 지난 2015년 1억 3500만원이었던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초판본을 넘어
국내 현대문학 작품 중 최고를 기록했다. 경매가가 작가의 문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겠으나,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되돌아볼 계기가 됐다.
김종인 박사의 남다른 평론에서 보듯, 만해의 사상이 얼마나 높은 경지와 폭넓은 지평을 지녔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이수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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