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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기도에 대하여

by maverick8000 2025. 3. 10.

 

 

어릴 적, 기도 중간에 실눈을 뜨고 기도하는 사람 얼굴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쏟아지는 소망의 내용이 길수록 사람은 저마다 절박함이 깊구나 싶어 가슴이 울렁였다.

그때 내 기도는 주로 원하는 물건 목록이었다.

간절함을 담아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은 어린 신앙은 점점 물건뿐 아니라,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직장인이 되자 기도 시간만큼 한탄의 목록도 길어졌다.

문학 공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IMF만 없었다면, 집을 샀더라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

원망한 것이다. 하지만 야근 때문에 늦잠을 자고 코앞에서 놓친 버스 앞에서 나는

‘그 장애물 자체가 내 삶’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니 지금까지 내 간절한 기도의 내용은 모두 틀린 것이었다.

 

 

이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기도한다.

한없이 추락하던 어느 날엔 위로를 줄 단어를 찾기 위해 기도한다.

기도의 말이 하늘에 닿기 전, 우선 내 귀와 가슴에 닿기를 원한다.

시인 ‘타고르’는 “고통을 멎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성공의 은혜가 아니라 “실의에 빠졌을 때 당신의 귀하신 손을 잡고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말이다.

나는 이제 작가로 큰 업적을 남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 매일 읽고 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위해 기도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별하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지혜를 바란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이를 많이 봤다.

그러나 포기가 곧 실패는 아니다. 때론 멈추는 게 더 큰 용기일 수 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은 바라는 걸 이루는 게 아니라, 흙탕물 같은 자기 마음을 정화해 평정과

냉정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이젠 기도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와 다짐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기도하는 모든 이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좋아질까.

우리 삶에 맑은 날만 이어진다면 이 땅은 꽃과 나무 없는 사막이 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별을 볼 수 있고, 빗속을 통과하면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백영옥 소설가

 

출처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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