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종의 아디스레터

대구 근교의 시골 마을, 나의 유년은 춘궁기 끝자락에 있었다. 보릿고개 세대는 벗어났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이웃집 아저씨가 텔레비전 한 대를 들여놓자 마을 전체가 들썩였다.
드라마 ‘여로’ 방영 시간이면 아이들부터 어르신들까지 그 집에 모여들었다. 흑백 화면 속 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에 울고 웃으며 어깨를 맞댔다.
빈곤했으나 사람 사이의 온기는 넉넉했고 서로의 결핍을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경제력에 따라 삶의 궤적이 갈라졌다.
친구들은 대구 시내의 유명 학원이나 은밀한 과외방에 다니며 앞서 나갔다. 내게 허락된 것은
덜컹거리는 기차 통학권뿐이었다. 고교 평준화 1기는 교사들에게 과도한 열정을 부여했고,
통학생들의 고단한 사정을 외면했다. 1교시 시작 전에 숨을 헐떡이며 교실 문을 열면 선생님의
꾸중이 날아왔다. “통학생은 학습 분위기를 해치는 적이다!” 벌칙으로 방과 후 빈 교실을 청소하며,
나는 가난이 주는 첫 ‘사회적 낙인’을 경험했다.
고3 때, 어머니는 대구 변두리에 쪽방을 얻어 가내수공업을 시작하셨다.
예비고사가 끝나자마자 성적이 비슷한 동기들이 서울의 유명 재수학원으로 떠났을 때, 나는 장갑 꾸러미를
짐자전거에 가득 싣고 공장 배달을 다녔다.
졸업식 날, 우등상을 받은 8명 중 나를 뺀 7명이 서울대로 진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난은 그저
삶을 좀 불편하게 만드는, 언젠가 벗어던져야 할 무거운 외투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도 가난은 그림자가 길었다. 전공원서가 비싸 사지 못했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군의관 시절엔 현실의 벽이 더 높게 느껴졌다. 당시 군의관 월급으로는 가정을 꾸리기가 쉽지 않았다.
인근 병원에서 야간당직 아르바이트를 하루만 하면 군의관 월급의 4분의 1을 벌 수 있어 유혹이 강렬했다.
더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다는 이상과 생활고 사이에서 나는 갈등했다.
가난은 여전히 끈질기고 구차한 불편이었다.
그 무렵 접한 책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는 가난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기득권을 분토처럼 버리고 빈자들과 함께한 그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가난을 신에게 다가가는 가장 순수한 통로이자 영혼의 자유를 얻는 길로 보았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가난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에 집중하게 하는 선물일 수 있다고.

이 신념은 아프리카 의료 현장에서 유익했다.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 부른다.
빈곤의 사슬로 희망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지 국립병원은 가난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돈 있는 이들은 사립병원을 찾고, 더 큰 부자들은 유럽으로 떠난다.
남겨진 이들은 말라리아와 결핵, 에이즈 같은 감염병의 파도 속에 속수무책 휩쓸려 간다.
가난해서 병이 들고, 병이 들어 더 가난해지는 잔인한 악순환의 종착점.
그들을 돕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정심으로 시작한 이들은 처참한 현실에 지쳐 떠나곤 했다.
나는 부족한 인격에도 불구하고 30여 년간 그들과 함께 호흡했다.
현지에서 결핵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갔고, 에이즈 환자를 진료하다 바늘에 찔려 자책도 했다.
함께 고통을 겪었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동자에 담긴 애환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겪은 가난과 고통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감의 열쇠였다. 흙수저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빈한한 곳에서는 역설적으로 감사가 넘쳐난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들어오고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게 당연한 곳에는 감사가 머물 자리가 없다.
일주일 넘게 물이 끊겨 집 안에 악취가 진동할 때였다. 어느 날 배관을 타고 ‘구르르’ 물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베를린필하모닉의 교향곡보다 벅찬 감동을 주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풍요가 감사를 삼켜버린 듯하다.
자산의 가치가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시대, 우리는 더 넓은 평수와 더 비싼 동네를 향한 무한 경쟁 속에 산다.
남과 비교하고, 더 가져야만 안심하는 이 비정상적인 가치관이 우리 영혼을 멍들게 한다.
내가 고개 숙여 존경하는 이는 부자도, 권력자도, 석학도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부유함은 교만을 불러오지만, 그 무게를 견디며 낮은 곳을 살피는 이가 있다면 언제든 달려가
그 발치에 앉아 배우고 싶다.
가난은 삶의 허기가 아니라 공감의 깊이다.
물질의 가난을 사랑의 부유함으로 치유할 수 있는 세상을 나는 꿈꾼다.
내가 지닌 낡고 보잘것없는 흙수저로 배고픈 이에게 희망 한 술 떠먹여 줄 수 있다면, 인생이라는
‘여로’는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 있다.
☞의사 유덕종
1992년 ‘정부 파견 의사’ 1기로 선발돼 우간다로 갔다. 계약을 연장하며 아프리카에 남았고 지금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길러낸 의사만 4000명.
아산상, JW성천상 등을 받았다.
현지에선 아디스아바바를 줄여 아디스라 부르는데 ‘아디스 레터’는 그곳에서 띄우는 편지다.
출처 : 조선일보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

'소소한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향 잃은 마산 아재 (0) | 2026.04.22 |
|---|---|
| 주중에 책 편집, 주말에 밭 편집 (2) | 2026.04.21 |
| 한 장의 사진 - 휠체어 위의 행복 (1) | 2026.04.21 |
| 나를 울게 한 사람 (0) | 2026.04.20 |
| 돈, 명예, 섹스 (0) | 2026.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