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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년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모든 것이 권태롭다면

by maverick8000 2026. 4. 23.

 

 

 

신상도, 맛집도, 새 애인도 권태롭다면

삶은 각설탕이다. 늘 뒤뚱거리며 서툴게 걷는 삶은, 어느 날 ‘권태’라는 찻잔 가장자리를 

위태롭게 지나가다 발을 헛디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권태 속에 빠진 각설탕은 허우적대보지도 못하고 녹아든다. 

권태의 물결이 곳곳으로 스며들어 삶은 형태조차 찾지 못한다.



안정적인 삶은 평온함의 축복을 이불처럼 덮는 것이어야 한다.

점점 길어지는 인간의 수명 역시 축복이어야 하며, 삶의 온갖 고문에 시달린 끝에 올라선

평평한 고원 같은 50~60대의 나이도 축복이야 한다.

그런데 여기, 저 축복을 따돌리며 자객처럼 소리 없이 스며드는 무서운 정서가 있다. 권태이다.

 

휴일의 창문으로 구부정한 노인처럼 들어서는 조용한 오후의 햇볕을 본 적 있는가? 

권태는 일상이다. 적막한 대기를 아무런 노력도 장애도 없이 건너온 저 느린 햇볕이 가득 채운 방은 

왜 이리 권태로운가? 인생의 모든 모험이 사라진 증거처럼.



마음에 매달려 있는 무거운 벽돌 한장 같은 저 권태는 왜 인간에게 찾아오는 것일까? 

당연히 인간이 시간적 존재이기에 그렇다. 시간만이 지루함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본디 지루하게 하고 있는 그것은 곧 하나의 특정한 방식으로 시간화하고 있는 시간성이다.”(이기상 외 역)



그러나 지루함 또는 권태가 인간이 겪는 특정한 방식의 시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권태에 대한 해명은 다 이루어진 것일까? 당연한 이런 해명에 우리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허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포만감 때문에 권태에 빠지는 존재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곤궁은 허기의 다른 말이고, 무료함은 권태의 다른 말이다. 

“필라델피아의 엄격한 형벌 제도는 고독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의해 단순히 무료함을 

형벌의 도구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 끔찍해서 죄수를 자살하게 만들 정도였다 (…) 

서민의 삶에서 곤궁이 일주일의 6일로 대변되듯이, 무료함은 일요일로 대변된다.”(홍성광 역) 

일하는 6일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 허덕이는 날들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요일은 권태로 가득 차 있다. 이게 삶이다. 

일요일이 무료함을 대변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저 말을 아주 잘 받는 구절이 있으니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그들은 일요일의 그 푸짐하고 긴 식사를 끝내고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이 죽어버린 셈이다.”(김희영 역) 

삶을 간절한 것으로 만드는 음식에 대한 욕망이 죽어버렸고, 그 죽은 자리를, 잔뜩 부른 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권태가 채운다.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롭고 욕망이 채워지면 권태 때문에 괴롭다. 

노쇠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은 힘을 다 써버리는 소진된 인간이기 십상이다. 권태의 인간은 그 반대이다. 

그는 힘과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인간이다. 권태는 너무도 무서워 죄수마저 자살하게 한다.



이 무서운 덫을 피하기 위한 쇼펜하우어의 해결책은, 그가 ‘의지’라고도 부르는 욕망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참된 행복, 즉 삶과 고뇌로부터의 구원은 의지의 완전한 부정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욕망을 못 채워 허기지고, 욕망을 채우면 권태가 밀려오는 까닭이다.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 모든 이성보다 높은 평화, 대양처럼 완전히 고요한 마음, 깊은 평정,

흔들림 없는 확신과 명랑함이 드러난다.”

욕망이 없는 사람에겐 허기로 인한 고통도, 권태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평정과 명랑함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안일한 생각이다. 

욕망 자체가 우리의 정체성이며, 욕망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욕망을 어떻게 

근절하겠는가? 무엇보다 권태는 자아의 근본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하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생각하듯 모든 권태는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권태이다. 

가령 직장에 대한 권태는 결국 그 직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권태이고, 

애인에 대한 권태는 그 애인과 지겹게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고 있는 다소 모자란 나 자신에 

대한 권태이다. 

여행을 통해 지구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쩌면 장래엔 화성으로도 떠날 수 있는 내가 유일하게 

떠날 수 없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모든 쾌락의 대상을 다 옮겨 다니고도 여전히 삶이 지루하다면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이 권태를 일으키는 

최종 보스라는 뜻이다. 신상을 입어도, 맛집을 찾아도, 케이블TV 앞에 앉아도, 마침내 새 애인을 만나도 

삶이 지겨울 때, 우리는 어떻게도 달래볼 도리 없는 권태의 주인공인 나 자신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치워야 할 쓰레기더미는 나의 내면에 있었다는 듯 말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나 자신과의 이별이다. 

이는 권태에게 마지막으로 나 자신을 먹잇감으로 던져주어 승리를 선물하는 자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껏 해온 일은 나 자신에게 온갖 쾌락을 조공으로 바치는 일이었다. 

조공이 지겨우면 나는 심술 주머니를 터트리듯 권태를 일으킨다. 그러니 권태를 소멸시키기 위해선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닌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이 뭘까? 

모든 사람의 삶을 대변하듯 그것을 명시할 수는 없다. 

다만 나 자신보다도 더 중요하게 내가 몰두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와 

지겨운 룸메이트를 달래듯 나 자신의 시중을 들며 권태로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나를 돌보는 시간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 또는 다른 이를 돌보는 시간일지 모른다. 

그것은 굶주린 어린이거나, 고통받는 한 마리 동물이거나, 병든 채 더럽혀진 대지를 흘러가는 

강물일 수도 있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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